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271화

깊은 눈 속, 다시 피어나는 약속

창밖으로는 희고 굵은 눈발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듯 고요한 겨울밤, 한은서의 작업실은 조명 아래 작은 우주처럼 따뜻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도화지 위를 유려하게 흐르며, 고요한 풍경을 수채화로 담아내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설원, 그 한가운데 우뚝 선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아슬아슬하게 눈꽃이 매달려 있었다. 문득 붓을 멈춘 은서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십수 년 전, 바로 이런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잊히지도, 잊을 수도 없는 그날의 약속.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도 무거운 맹세는 어른이 된 그녀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은서는 무심코 왼쪽 손목을 쓸어보았다. 어릴 적,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으로 지훈의 작은 손을 붙잡고 나누었던 체온의 기억이 아련했다. 그때의 약속은 과연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지훈이 사라진 후, 그녀의 삶은 겉으로는 평온하고 성공적인 궤도를 달렸지만,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그날의 아물지 않는 상처와 질문이 남아있었다. 겨울이 올 때마다, 눈이 내릴 때마다 그 질문은 더 깊게 파고들었다. 마치 약속의 무게를 재는 듯이.

얼어붙은 시간의 조각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든 은서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거실로 향했다. 거실 창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밤새 세상이 통째로 하얀 솜이불을 뒤집어쓴 듯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내려 마시며, 은서는 지난밤 꿈에 나타난 지훈의 흐릿한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지훈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그 미소는 위로 같기도, 혹은 책망 같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은서는 작게 놀랐다. 이런 눈 오는 날, 누구지? 문을 열자 우체부 아저씨가 서 있었다. “한은서 씨 되시죠? 등기 소포 왔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명을 하고 묵직한 소포를 받아들었다. 발신자는 낯선 이름이었다. “박선생”? 주소 역시 생소했다. “강원도 산골 요양원.” 은서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강원도 요양원 주소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예기치 않은 소포

소포를 들고 작업실로 돌아온 은서는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뜯었다. 안에는 뽁뽁이로 몇 겹이나 싸인 물건이 들어 있었다. 뽁뽁이를 벗겨내자, 손때 묻은 작은 나무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짹짹거리는 작은 새 모양의 나무 조각. 은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숨이 턱 막혔다. 이 새는… 이 새는 분명…

어린 시절, 은서와 지훈이 함께 조각했던 나무 새였다. 그때 지훈이 말했다. “이 새는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의 약속을 기억할 거야. 은서야, 절대 잊지 마.” 낡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나무 새를 손에 든 은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대체 어떻게 이 새가 여기에? 누가 보낸 거지?

나무 새 아래에는 흰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찢어질 듯한 두려움과 형용할 수 없는 기대감이 교차하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편지지는 세월의 흔적을 담은 듯 바래 있었고, 정갈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한은서 님께.
오랜 시간, 당신의 소식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편지가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강원도 산골 요양원에서 이지훈 군을 돌보고 있는 박선생입니다.
지훈 군은 십수 년 전 불의의 사고로 깊은 잠에 빠진 후,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작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때때로 아주 희미하게, 당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때마다 지훈 군의 손에 쥐여 있던 작은 나무 새를 봅니다. 그리고 오래전 그가 자주 이야기했던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지훈 군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디, 이 편지를 받고 지훈 군에게 찾아와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방문이, 어쩌면 지훈 군을 다시 깨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한 주소와 연락처를 동봉합니다.

강원도 평안 요양원 박선생 드림.”

편지지가 은서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지훈이 살아있었다. 그것도 혼자, 먼 산골 요양원에서 십수 년을 잠들어 있었다니. 배신감, 죄책감, 그리고 무엇보다 격렬한 희망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새로운 여정의 시작

은서는 편지지와 나무 새를 쥐고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눈은 흩날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 지훈과 함께 했던 그 겨울, 함께 꿈꾸었던 미래가 마치 얼어붙은 시간처럼 멈춰 있다가 이제야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찾아온 삶의 외침이자, 잊었던 약속의 부름에 대한 대답이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은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박선생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지훈에게 가는 것.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마침내 지키러 가는 것. 그녀는 주저 없이 발신자의 번호를 눌렀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그녀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여정이, 새로운 겨울이, 새로운 약속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