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는 가장 잔인한 감옥이었다. 차분한 공기 속에서 서하는 마치 진공 상태에 갇힌 듯,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마저 멀리서 들려오는 타인의 울음처럼 느꼈다. 낡은 책들이 빼곡히 들어찬 고대 기록 보관소는 그녀에게 안식처이자 동시에 또 다른 미로였다. 시간의 거친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춰 선 이 공간은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감싸 안는 거대한 관 같았다.
오래된 양피지 냄새, 먼지 앉은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햇살. 모든 것이 평화로웠지만, 서하의 내면은 거센 폭풍우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떤 특정 기록을 좇는 대신, 허공에 맴돌았다. 시선은 초점을 잃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상념 속으로 침잠해갔다.
강준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서하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잊힌 과거를 함께 찾아 헤매고, 위태로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그는 서하가 이런 상태에 빠질 때마다 늘 그랬듯,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서하의 기억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때보다, 오히려 이렇게 잊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서서히 맞춰질 때 그녀는 더 고통스러워했다. 기억은 축복이 아닌, 잔인한 채찍이 되어 그녀를 후려쳤다.
그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저릿하게 시려왔다. 익숙한 환영이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과는 달랐다. 흐릿했던 윤곽이 선명해지고, 뭉개졌던 소리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 작고 여린 손이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는 감각.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 나무로 된 작은 흔들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가야, 엄마가 여기 있어.”
나직하고 상냥한 노랫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 소리는 너무나 애틋하고, 너무나 절절하여 서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뻔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잊혀졌던 자신의 목소리. 왜 그토록 오래 잊고 있었을까. 왜 이제야 들려오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녀는 그 질문에 매달릴 여유조차 없었다.
흔들침대 안에 누워있던 작은 생명체가 몸을 뒤척였다. 보드라운 머리카락, 맑고 투명한 눈동자, 천진난만한 웃음. 아기였다. 그리고 그 아기는, 서하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서하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벅찬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엄마…”
작고 여린 입술에서 튀어나온 단 한 마디. 그 순간, 서하의 온몸을 꿰뚫는 전율과 함께 모든 것이 맞춰졌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흐릿한 환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녀의 과거, 그녀의 일부였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였다. 시간 여행자로서, 어떤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던 자신이 감히 가질 수 없다고 여겼던, 혹은 잊어야만 했던 존재. 서하는 흐느끼는 숨을 들이쉬었다. 따뜻했던 순간은 잔인하리만치 짧았다. 아기의 웃음소리가 이내 흐려지고, 공간이 일그러졌다. 눈앞의 풍경은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따뜻한 보금자리는 순식간에 차갑고 낯선 연구실로 바뀌었다. 알 수 없는 기계음과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찢어발기는 듯한 절규가 귓가에 울렸다.
“서하! 정신 차려! 아이를 데려갈 수 없어! 모두가 위험해진단 말이야!”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선 이 순간 이별해야만 한다고, 수없이 자신을 설득하던 과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본능은 그 어떤 논리도 거부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아이의 손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작은 손은 그녀의 손가락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엄마 가지 마…”
아이의 울먹임과 함께 눈물이 서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강압적인 힘에 의해 아이는 그녀의 품에서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맑은 눈빛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배신감과 슬픔, 그리고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 눈빛은 칼날이 되어 서하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안 돼… 안 돼…!”
서하는 절규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무릎을 꿇었다.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메마른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은,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그녀의 영혼을 태웠다. 왜 이 기억이 봉인되었는지, 왜 이토록 자신에게 잔인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자였다.
강준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서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안타까움과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하의 고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져, 어떤 위로의 말도 무의미하게 들릴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아이를 버렸어…” 서하는 강준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내가… 내 손으로… 내 아이를…”
강준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서하.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너는 선택해야만 했어. 너의 임무와… 그리고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하지만 서하에게는 강준의 말이 닿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여전히 자신을 떠나보내던 아이의 눈빛이 선명했다. 그 작고 여린 생명체가 느꼈을 절망을 상상하자, 서하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녀는 시간 여행자였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싸워왔다. 하지만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실패했다. 가장 중요한 존재를 지키지 못했다.
갑자기 서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슬픔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에서 결연한 의지가 타올랐다. 그녀는 강준의 품에서 벗어나, 힘없이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정면을 향했다. 기록 보관소의 어두운 벽을 뚫고, 시간을 넘어선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강준.”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렸지만, 전과는 확연히 다른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재이였어.”
강준은 침묵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미묘한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재이. 그녀의 잃어버린 아이의 이름. 그 이름은 이제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라, 서하를 이끄는 새로운 등대가 될 터였다.
“나는… 찾아야 해.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이 모든 기억을 잃고 헤매는 동안, 내 아이는… 어떻게 지냈을까.” 서하의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자, 나의 유일한 목적이야.”
그녀의 눈빛은 강렬하게 타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머니의 본능이, 시간의 벽을 뚫고 그녀의 의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그녀에게는 이제 되찾아야 할 가장 소중한 존재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기억을 잃은 시간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재이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시간의 모든 장벽을 허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차디찬 기록 보관소의 공기 속에서, 서하의 뜨거운 다짐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