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젤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창백한 빛이 스며드는 작업실은 공기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 김지훈은 삐걱거리는 마루를 밟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울렸다. 수많은 밤을 헤매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무수한 단서들을 좇아왔다. 이 모든 여정의 끝이, 혹은 새로운 시작이 바로 이 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그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어제 밤, 익명의 메시지로 전송된 주소는 너무나도 오래된 지번이었다. 지도 앱에서도 겨우 흔적을 찾을 수 있는 폐건물. 하지만 그 속에서 지훈은 희미하게 서연의 이름을 보았다. 그녀가 한때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던, 빛바랜 꿈의 조각들을.
“누구세요?”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백발의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형형한 눈빛이 지훈을 꿰뚫었다. 그녀의 표정은 경계심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지훈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드디어 만난 것이다. 서연의 그림 스승이었던 박미영 교수. 그녀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김지훈입니다. 서연… 서연이를 찾는 탐정입니다.”
교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지훈의 낡은 코트와 지친 눈을 잠시 응시하더니, 천천히 손짓했다.
“앉아요. 올 사람이 올 때가 된 모양이군.”
마치 지훈이 올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말투에 지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훈은 자신의 감정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혼돈 속에서, 그는 오직 서연의 이름을 외칠 준비만 하고 있었다.
“서연이는…” 지훈이 겨우 입을 열었다. “무사한가요? 어디에 있습니까?”
박 교수는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응시했다. 봄 햇살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무사하다는 말이, 살아있다는 뜻이라면… 그렇습니다. 살아있어요.”
그 한마디에 지훈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려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살아있다니. 이토록 절박하게 찾아 헤맨 그녀가,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니.
“하지만… 당신이 알던 서연은 아닐 겁니다.”
교수의 말은 차갑고 단호했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한쪽 벽에 걸린 덮개 아래의 그림으로 향했다. 낡은 천을 걷어내자, 강렬한 색채의 유화 한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 서연의 화풍이었다. 그녀의 섬세하면서도 대담한 붓 터치가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그러나 그림 속의 인물은… 지훈이 기억하는 서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자화상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긴 눈동자. 창백한 피부 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흉터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아름답고 생기 넘치던 그의 첫사랑은 그림 속에서 처연하고 고독한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건… 서연이 맞습니까?”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년 전, 저에게 보내온 마지막 그림이에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라더군요.”
교수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아이는… 너무 많은 것을 겪었어요. 당신이 알던 그 밝고 명랑한 서연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훈은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림 속 서연의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는 듯했다. 마치 그녀의 고통이 그림을 통해 지훈에게 직접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흉터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의 기억 속 서연은 늘 웃고 있었다. 햇살처럼 따스하고,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던 그녀가 어쩌다 이토록 시들고 말았을까.
“서연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제가 찾아가서, 그녀를 다시 웃게 해줄 겁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어요.”
지훈의 절규에 가까운 말에 박 교수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그녀는… 스스로를 숨겼습니다. 당신이 찾아 헤매던 서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요.”
그녀는 테이블 위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빛바랜 편지 한 통과 작은 은색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목걸이는 지훈이 서연에게 선물했던,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것이었다. 지훈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이것은…”
“이 편지는… 서연이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당신에게 직접 전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기 위해, 지금까지 감춰두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그녀를 찾아낼 만큼 충분히 간절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전해줄 때가 된 것 같군요.”
박 교수는 편지를 지훈에게 건넸다. 편지는 얇고, 낡았으며, 지훈의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에 닿자,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 속에는 낯익은 글씨체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글씨체는 이내 지훈의 심장을 얼어붙게 할 단 한 문장을 담고 있었다.
‘지훈아, 더 이상 나를 찾지 마. 나는 네가 기억하는 서연이 아니야. 그리고… 넌 이미 늦었어.’
마지막 문장이 지훈의 눈앞에서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늦었다니? 무엇이? 그의 긴 여정이, 그의 간절한 사랑이,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인가? 지훈은 손에 든 편지와 그림 속 슬픈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은 무너져 내리는 절벽처럼 아득했다. 이 모든 것의 끝은, 과연 어디로 향하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