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지아는 창밖으로 스며드는 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을 등지고 앉아, 낡은 가죽 표지를 어루만졌다. 칠십팔 번째의 이야기는, 할머니가 평생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어떤 조각을 풀어낼 차례였다. 지아는 몇 날 며칠을 이 일기장과 씨름하며 할머니의 청춘과 고뇌, 그리고 말없이 견뎌낸 한을 마주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쌉쌀한 냄새와 함께 섬세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펼쳐든 날짜는 1953년 7월 26일.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그러나 역사의 전환점을 앞둔 그 날의 기록이었다. 글씨는 다른 날보다 유독 흐트러져 있었고, 몇몇 문장 위에는 번진 흔적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눈물이 떨어진 흔적임을 지아는 직감했다.
그 해 여름, 마지막 이별
“오늘은 미영이를 보냈다. 차마 붙잡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작은 손을 놓는 순간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배고픔과 추위, 끝없는 공포 속에서 너를 지켜줄 수 없었던 언니의 무력함이 너무도 원망스럽구나.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너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비로소 그 결정을 내렸다. 저 먼 땅에서는 부디 따뜻한 밥을 먹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들기를. 언젠가, 언젠가는 꼭 너를 다시 찾으러 갈게. 미영아, 내 아가…”
글은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격렬하게 흐느낀 듯한 글씨들이 간신히 이어지다가 이내 물결처럼 일렁이며 사라졌다. ‘미영이.’ 지아는 낮게 읊조렸다.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름이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이별의 기록이라니. 할머니에게 미영은 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여동생? 어쩌면 할머니가 키웠던 조카? 아니면… 자신의 아이?
지아는 일기장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평소 할머니는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고통은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라며, 늘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하지만 그 침묵 아래 이토록 깊은 슬픔과 후회가 숨어 있었다니. ‘미영아, 내 아가…’ 그 문장은 지아의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어쩌면 미영은 할머니의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쟁 통에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자식.
지아는 일기장 위에 얼굴을 묻었다. 할머니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미영을 떠나보낸 그날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 결정이 할머니에게 평생 어떤 멍에로 남았을지, 지아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때때로 공허했던 눈빛, 알 수 없는 슬픔이 드리워져 있던 뒷모습이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잊혀진 기억의 조각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던 지아는 문득 일기장 속에서 얇은 무언가가 스르륵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낡고 바랜, 거의 종잇조각에 가까운 사진이었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올리자, 사진 속에는 앳된 할머니의 모습과 그 옆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아이의 손을 꽉 잡고 있었고, 아이는 불안한 듯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었다. 아이의 눈망울은 크고 까만데, 어딘가 슬픔이 어린 듯했다.
사진 뒷면에는 할머니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53년 봄, 이별 전 마지막으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아이가 미영이었다. 할머니의 소중한 ‘아가’. 지아는 사진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토록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할머니의 비밀,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온 상처가 드디어 빛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이 왜 이 날짜의 일기장 사이에 끼워져 있었을까. 그리고 할머니는 왜 이토록 중요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으셨을까.
지아는 할머니의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미영에 대한 다른 흔적은 없을까. 혹시 할머니가 찾으러 가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기록은 없을까. 오래된 편지 뭉치, 빛바랜 엽서들 사이를 헤치던 지아의 손끝에 닿은 것은 얇고 긴 봉투 하나였다. 겉면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해외 우표가 붙어 있었고, 발신인은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International Adoptee Search Center.’
지아의 숨이 턱 막혔다. 봉투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할머니가 이 편지를 받으셨지만, 열어보지 않으신 걸까? 아니면 열어보셨지만, 차마 지아에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 숨겨두셨던 걸까?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지아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영어로 된 몇 장의 서류와 함께, 한글로 된 얇은 메모지였다.
메모지에는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신자 어르신께. 70여 년 전 한국 전쟁 중 해외로 입양된 귀하의 여동생 김미영 씨가 가족을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현재 미국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으며, 간절히 혈육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첨부된 서류에 상세 정보가 있습니다. 연락을 기다립니다.”
지아는 손에 든 종이를 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영이 살아있었다. 할머니가 평생을 후회하며 가슴에 품고 살았던 그 ‘아가’가, 지금 저 먼 땅에서 할머니를 찾고 있었다. 70년의 세월이 흘러,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비로소 오래된 약속의 매듭을 풀어낼 열쇠가 된 순간이었다. 지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사실을 할머니께 어떻게 전해야 할까. 할머니는 이 엄청난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기쁨? 아니면 묵혀왔던 슬픔이 다시 터져 나올까?
지아는 눈앞의 서류와 낡은 일기장, 그리고 빛바랜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갇혀 있던 한 사람의 인생이자, 잊혀진 약속, 그리고 지금 막 새로운 희망을 품고 태어날 가족의 연결고리였다. 지아는 무거운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할머니의 오래된 슬픔을 치유하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줄 시간이 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