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74화

밤이 내리는 시간은 늘 그랬듯, 지혜에게는 하루 중 가장 정직한 순간이었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점멸하고, 창밖은 낮 동안의 소란을 잊은 듯 고요에 잠겼다. 그녀는 익숙하게 발코니 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늦가을의 밤공기는 쌉쌀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향을 머금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 향이 유독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얼마 전부터 지혜의 마음을 짓누르는 숙제가 있었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어쩌면 그녀 자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작은 공방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손때 묻은 작업대, 수많은 시행착오의 흔적이 남은 도구들,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났던 수많은 꿈과 희망들. 그것들을 떠나보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텅 비어버리는 듯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때였다. 늘 그랬듯,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 한 생명이 그녀의 발치에 몸을 비볐다. 검고 부드러운 털, 밤하늘을 닮은 깊은 눈동자. 길고양이 ‘별이’였다.

별이는 지혜의 다리에 머리를 부비고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조용히 지혜 옆에 몸을 웅크렸다. 지혜는 별이를 안아 올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그녀의 품으로 전해졌다.

침묵 속의 대화

“별아,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떠나보내는 것이 힘들까.” 지혜는 별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냥 낡은 공간일 뿐인데, 왜 이리 미련이 남을까.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이제는 놓아줘야 하는데 말이야.”

별이는 나른하게 눈을 감고 지혜의 손길을 즐기는 듯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지혜의 얼굴을 말없이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늘 지혜가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이해와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이 공방에서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는지 몰라. 처음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의 기쁨, 잘 풀리지 않아 좌절했던 순간들… 이 모든 것이 마치 내 살점 같아.” 그녀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꼈다. “이걸 버리고 나면,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게 될 것 같아.”

별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고는 작게 ‘야옹’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정말로 그럴까?’ 하고 되묻는 듯했다.

지혜는 별이의 눈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밤하늘의 별을 품은 듯한 그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 있었다.

“그래, 네 말처럼… 정말 그럴까? 내가 나를 잃어버릴까?” 지혜는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어쩌면 나는, 이 공간에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얽어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시선

별이는 지혜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발코니 난간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 그 광활함 속에서 공방의 작은 창문은 마치 보이지 않는 점과 같았다.

별이의 시선이 마치 그녀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보렴, 저 넓은 세상을. 너의 세상은 저기 저 공방의 벽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아.’

지혜는 별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익숙했던 풍경이 문득 낯설게 다가왔다.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별아. 나는 항상 저 넓은 세상에 시선을 두었었지. 어렸을 적엔 말이야. 공방은 그저 나의 꿈을 키우는 작은 보금자리였을 뿐인데, 언제부터인가 그 자체가 나의 전부가 되어버렸어.”

별이는 지혜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발코니 바닥에 편안히 몸을 눕히고, 꼬리를 살랑이며 지혜를 응시했다. 그 눈빛은 ‘이제 알았니?’ 하고 묻는 듯했다.

지혜는 별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가운 바닥의 감각이 오히려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내 작품들, 내 열정, 내 노력… 그것들은 공간에 갇히는 게 아니었어. 그것들은 이미 내 안에 스며들어, 나를 이루는 일부가 되었는데. 나는 왜 그 사실을 잊고, 그저 낡은 벽돌과 나무 조각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별이는 가늘게 눈을 뜨고 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길고양이의 삶은 늘 변화의 연속이다. 익숙한 자리를 떠나야 할 때가 있고,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나설 때가 있다. 그들에게 영원한 보금자리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을 잃지 않는다. 어디에서든, 그들은 길고양이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

놓아주는 용기, 새롭게 피어날 희망

지혜는 별이의 털에 얼굴을 기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불안을 녹여주는 듯했다. 별이는 깊은 골골송을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우물이 뿜어내는 샘물처럼, 지혜의 메마른 마음에 촉촉한 위로를 전했다.

“그래, 별아. 네 말이 맞아.” 지혜는 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겠지. 그 공방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에게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때인 것 같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 전의 망설임 대신, 새로운 결심과 미묘한 해방감이 깃들어 있었다. 공방을 떠나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통과 의례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별이는 지혜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지혜의 손가락을 혀로 핥았다. 그 작은 행동에서 지혜는 용기와 격려를 읽었다.

발코니 너머 밤하늘에는 별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지혜의 마음속에 새롭게 피어나는 희망을 축복하는 듯이. 지혜는 별이를 꼭 안았다. 이 작고 검은 생명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큰 위로와 지혜를 가져다주는지, 새삼 깨닫는 밤이었다.

어쩌면 삶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놓아주고 또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온 작은 친구와의 대화가, 때로는 가장 큰 깨달음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지혜는 발코니에 앉아, 따뜻한 온기를 품은 별이와 함께 오래도록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불안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고요한 밤의 별들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