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속에서 피어나는 기다림
하은은 창밖을 응시했다. 회색빛 하늘은 며칠째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유리창에 맺힌 차가운 습기가 손끝을 시리게 했지만, 그녀는 그마저도 외면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창문을 닦아내자, 뿌옇던 시야 너머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잔혹한 풍경이었다.
일기예보에서는 주말 내내 눈 소식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단순한 눈이 아니라, 도시를 온통 하얗게 뒤덮을 폭설의 예고였다. 하은의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파도쳤다. 3년 전, 그날 지훈과 했던 약속이 그녀의 뇌리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은아,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어떤 역경이 닥쳐도 서로를 잊지 말자. 그리고… 첫 번째 폭설이 내리는 날, 이 카페에서 다시 만나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창밖으로 막 내리기 시작한 첫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의 눈빛은 맑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 후로, 지훈은 그녀의 삶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거대한 배후의 그림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다는 소문만이 무성했다. 하은은 수많은 날들을 기다림으로 보냈다. 그림으로, 때로는 붓 대신 펜을 쥐고 그의 이름을 속삭이며.
메마른 희망 위로 내리는 눈
“아직도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
수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짙은 걱정이 배어 있었다. 작업실 문이 열리고 따뜻한 커피 향이 밀려들었다. 수진은 하은의 옆에 의자를 당겨 앉으며, 그녀의 캔버스를 힐끗 보았다. 그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그 위를 걷는 듯한, 작고 희미한 두 인영이 그려져 있었다.
“약속했잖아.” 하은은 붓을 든 채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약속 하나로 버텨왔어, 지난 3년을.”
수진은 한숨을 쉬었다. “하은아,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강태호 씨도 그렇고… 네 옆에서 너를 지켜봐 주는 사람도 있는데 언제까지 환영만 쫓을 거야?”
강태호. 그의 이름이 들려오자 하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강태호는 지훈이 사라진 후, 하은의 전시회를 후원하며 꾸준히 그녀의 곁을 맴돌았던 남자였다. 능력 있고 신사적이었지만, 하은에게는 그저 친절한 후원자일 뿐이었다. 그는 지훈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다. 채워서도 안 되는 자리였다.
“환영이 아니야. 지훈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눈이 오면.”
수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저 친구의 굳건한 믿음을 보듬어줄 뿐이었다.
도시를 뒤덮는 하얀 침묵
금요일 밤, 예고된 폭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도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거대한 함박눈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며 모든 소음을 흡수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하얀 도화지가 되었고, 창밖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변해갔다. 하은은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그녀는 작업실 불을 끄고, 외투를 걸쳐 입었다. 지훈과 약속했던 그 카페. 그곳으로 가야 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강태호였다. 하은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하은 씨,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폭설이 너무 심해서 차량 통행이 어렵습니다.”
강태호의 목소리에는 걱정보다는 어딘가 통제하려는 듯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움직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갈 곳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쪽과는 상관 없는 일이에요.” 하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은 씨, 지훈 씨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당신 곁을 지켰는데…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세요.”
강태호의 말은 차갑게 얼어붙은 칼날처럼 하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의 말에서 오는 충격보다 더 큰 것은, 그가 지훈의 행방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였다. 하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의 말이 족쇄처럼 자신을 묶으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폭설 속의 실루엣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오자, 이미 눈은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차가운 눈보라가 얼굴을 강타했다. 약속 장소인 카페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지금 같은 날씨라면 두 배는 더 걸릴 것이다. 택시도, 버스도 다니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지훈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 너도 반드시 올 거야.’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눈송이들이 그녀의 시야를 가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고요한 설원 속에서 그녀의 심장 소리만이 격렬하게 울렸다.
저 멀리, 약속 장소인 ‘고요한 시간’이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거의 다 왔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발걸음을 옮기는데, 카페 입구에 서 있는 흐릿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착각일까? 눈보라가 심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실루엣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늘 꿈속에서 그리던, 그리움으로 아로새겨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하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그녀의 가슴속은 뜨거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녀는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눈길에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지만, 굳건히 중심을 잡았다.
“지… 지훈아?”
목소리가 겨우 터져 나왔다. 눈보라 속에서 희미하게 서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하은의 눈에, 익숙하지만 조금 더 깊어진 눈빛이 담겼다. 그 속에는 슬픔과 회한,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마침내 그녀의 눈앞에 섰다. 하얀 눈꽃이 그의 어깨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하은아… 미안해. 그리고… 돌아왔어.”
그 순간, 하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눈송이들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섞였다. 3년. 3년이라는 긴 세월이 이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훈의 눈빛 뒤에는 여전히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왜 사라졌던 걸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위험은 정말 끝난 것일까? 하은은 그의 품에 안기면서도, 이 재회가 시작일 뿐이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새로운 폭풍이, 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재회 뒤에 숨어 다가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