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은 짙푸른 벨벳처럼 깊었다. 창밖으로는 작은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한낮의 빛을 잃은 세상은 흑백 사진처럼 고요했고, 그 속에서 하윤은 차가운 유리창에 기댄 채 숨죽여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함께 단단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며칠 전, 그들에게 닥쳐온 진실은 마치 얼음 칼날처럼 심장을 꿰뚫었고, 이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야 했다. 은호에게 드리워진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를 쫓아온 과거의 악몽이 결국 지혁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질식시켰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가장 힘든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윤아.”
낮고 단호한 지혁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그는 조용히 하윤의 뒤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코트를 걸쳐주었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는 하윤의 차갑게 굳은 어깨를 녹이는 듯했지만, 그녀의 마음속 냉기는 여전했다.
“왜 잠이 들지 않고 여기에 서 있어.” 지혁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의 따뜻한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감기에 걸리겠어.”
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는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그냥… 눈이 오는 게 예뻐서.”
“예쁘지.” 지혁은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그 겨울날의 약속처럼, 여전히 눈은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약속이 순수한 희망이었다면, 오늘의 눈은 불안과 침묵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너는 지금 예쁘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잖아.”
그의 정확한 지적에 하윤은 숨을 멈췄다. 지혁은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그녀의 계획을 그가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져야 했다. 아니, 그를 밀어내야만 했다.
“지혁아, 우리… 헤어지자.”
하윤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부서질 듯 연약했다. 지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쓰라린 고통이 스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혁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 네가 어떤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도.”
“아니, 넌 몰라.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 모든 게… 너와 은호에게까지 해를 끼칠까 봐 얼마나 두려운지 넌 상상도 못 해.” 하윤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내가 떠나야 해. 내가 사라져야 이 모든 악몽이 끝나는 거야.”
그녀는 지혁의 시선을 피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은 더욱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검은 밤을 가득 채우며 춤을 추듯 떨어졌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네가 사라지면, 그 악몽이 과연 끝날까?” 지혁은 차분하게 반문했다. “아니. 그때부터 진짜 악몽이 시작될 거야. 우리에게는. 은호에게는.”
그는 하윤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돌려세웠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절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이 모든 게 너와 나, 그리고 은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사랑… 사랑하지 않아도 돼.”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애썼다. “네가 이 모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거짓말할 수 있어.”
그녀의 말에 지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하윤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차가웠던 그녀의 손은 그의 온기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귀에 거세게 울렸다.
“다시 말해 봐.”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긴 이 순간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소중해서, 차마 그를 밀어낼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따뜻함이 곧 차가운 현실로 변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겠지.” 지혁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럴 리 없어, 하윤아. 우리의 모든 순간들은 거짓이 아니었어. 겨울 눈꽃이 내리던 그날의 약속은, 우리 존재 자체에 새겨진 거였어.”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혼자 감당하려 했던 모든 무게를, 이제는 나에게도 나눠줘. 우리는 함께야. 이젠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어.”
바로 그때였다. 조용했던 복도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잠이 덜 깬 은호가 작은 인형을 안은 채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엄마… 아빠… 왜 여기에 있어요?”
순수하고 맑은 은호의 목소리가 차가웠던 공기를 따스하게 데웠다. 은호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하윤의 다리에 매달렸다. 하윤은 은호를 꽉 안아주었다. 작은 온기가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지혁은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굳건한 결심과 함께,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괜찮을 거야.” 하윤은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 말은 지혁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창밖 세상을 온통 뒤덮으며, 그들의 앞날에 드리워진 어둠을 잠시나마 가려주는 듯했다.
지혁은 하윤과 은호를 함께 안았다. 세 사람의 체온이 합쳐지자, 그 어떤 혹독한 겨울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함이 샘솟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창밖의 설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험난한 길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폭풍을 함께 헤쳐나가야만 했다. 그들의 앞에는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