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414화

새로운 아침, 낡은 그리움

산모퉁이를 돌아 불어오는 봄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이제 막 깨어나려는 생명의 기운이 역력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 끝에는 연둣빛 새싹들이 희미하게 돋아나 있었고, 얼었던 흙에서는 이름 모를 풀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삐걱거리는 마루에 앉아,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올해는 유독 그 풍경 속에 묻어나는 시간이 더 깊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이고, 벌써 이렇게나 세월이 흘렀네.”

할머니의 나직한 혼잣말은 봄바람에 실려 멀리멀리 흩어지는 듯했다. 마당 한켠의 살구나무는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묵직한 가지마다 분홍빛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저 나무가 몇 번의 꽃을 피우고, 몇 번의 열매를 맺었는지,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시간 속에는 잊히지 않는 아련한 기억들이, 마치 흩날리는 꽃잎처럼 박혀 있었다.

예고된 방문

그때였다. 흙담 너머로 덜컹거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이 외진 시골 마을에 평소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할머니의 낡은 심장이 문득 한 박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아, 담장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손녀 지원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맑고 звонкий 목소리가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 지원은 한 손에는 작은 짐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활짝 웃으며 달려올 지원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얼굴에 옅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모습에 할머니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느꼈다.

“왔느냐. 이리 와 앉거라. 멀리서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지원은 할머니 옆에 조용히 앉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자, 지원은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처럼, 지원의 마음속에도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지원이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봉투는 두툼했고, 낯선 영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꺼내 봉투를 살펴보았다. 봉투의 발신인 주소는 미국이었다.

“이게 대체… 무엇이냐?”

할머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봉투 속에서 접힌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아버지한테서 온 편지예요. 어제 밤에 제 이메일로도 먼저 연락이 왔는데… 손편지로도 보내셨더라고요.”

‘아버지’. 그 단어가 할머니의 가슴을 쿵 하고 내려쳤다. 수십 년간 잊힌 듯 잊히지 않고, 사라진 듯 사라지지 않았던 이름. 할머니의 아들, 지원의 아버지, 김성철. 그가 자식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난 지도 어언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었다.

지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서툰 한국어와 영어 단어가 섞여 있었지만, 그 진심만은 또렷하게 할머니의 가슴에 와닿았다.

‘어머니께, 그리고 나의 딸 지원에게.
너무나 오랜만에 펜을 듭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그동안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돌아가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사가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지원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제가, 염치없이 드리는 부탁입니다.
이번 봄, 저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것입니다. 4월의 마지막 주, 그 즈음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지를 다 읽자, 마루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원은 할머니의 앙상한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할머니…”

지원은 할머니의 어깨를 조용히 감쌌다. 할머니는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듯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살아생전에 다시 볼 줄이야… 내가 이 못난 자식을…”

아들을 향한 그리움과 원망, 회한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젊은 날의 강고했던 할머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홀로 자식을 기다려 온 늙은 어머니의 마음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지원은 아무 말 없이 할머니를 안아주었다. 그녀 역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였다. 미움인지,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갈등의 그림자

한참을 울고 난 할머니는 겨우 눈물을 그쳤다. 하지만 그렁그렁한 눈에는 아직도 깊은 상념이 담겨 있었다.

“그 아이가…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묻어났다. 수십 년간 홀로 남겨진 외로움, 자식에게 버려졌다는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었다. 지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머니, 아버지가 많이 아프대요. 마지막으로 가족을 보고 싶다고…”

“마지막이라니… 네 아버지는 늘 그랬어. 제 좋을 대로만 생각하고… 자기 몸이 아프니 이제 와서 어미를 찾는 것이냐.”

할머니는 고개를 돌렸다. 복잡한 감정들이 뒤얽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지원은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썼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었다. 그저 사진 속의 젊은 얼굴과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할머니…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아버지를 용서하든, 아니면 그동안의 응어리를 풀든… 한 번은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요? 할머니의 아들이잖아요.”

지원의 말에 할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무게, 그리고 ‘자식’이라는 핏줄의 끈은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할머니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살구나무는 여전히 꽃망울을 품고 있었다. 마치 굳게 닫힌 할머니의 마음처럼.

새로운 시작을 향해

지원은 할머니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억지로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할머니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줄 작정이었다. 마당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봄바람은 살랑살랑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마치 잊고 있던 옛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할머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루 끝에 놓아두었던 작은 화분을 들었다. 그 화분에는 겨우내 시들었던 작은 이름 모를 꽃이, 이제 막 연약한 새순을 틔우고 있었다.

“이 아이도… 다시 살아나는구나.”

할머니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지원은 할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을 담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이제 아주 희미하게나마 새로운 빛이 깃들기 시작하는 듯했다.

“지원아.”

“네, 할머니.”

“네 아버지에게 답장을 보내거라. 너무 늦지 않게 와도 좋다고… 내가 직접 말할 수는 없으니, 네가 대신 전해다오.”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지원은 울컥 감격했다. 얼어붙었던 세월의 강물이 드디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할머니는 작은 꽃화분을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양지바른 곳에 조심스럽게 화분을 내려놓았다.

“따뜻한 햇볕을 쬐어야 빨리 자랄 텐데…”

할머니의 시선은 화분 속의 작은 새순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 너머, 4월의 마지막 주, 이 집으로 향할 누군가를 향하고 있는 듯했다. 봄바람은 여전히 불어와, 할머니의 흰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 바람은 슬픔과 희망, 그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새로운 시작의 소식을 멀리멀리 실어 나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