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에 맞춰 숨을 골랐다. 낡은 카페의 탁한 조명 아래, 그는 손에 든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묵묵히 응시했다. 사진 속에는 맑게 웃는 지은의 모습과, 그 옆에서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20년 전, 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어느 여름날의 기억. 그 기억의 파편을 쫓아 그는 반평생을 헤매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발자국 그녀에게 다가섰다. 아니, 어쩌면 더 멀어졌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조금 전, 현우는 최수진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지은이 마지막으로 일했던 사무실의 동료였던 수진은 처음에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현우를 대했지만, 현우가 내민 지은의 사진 앞에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수진의 떨리는 목소리는 현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오래된 기억, 새로운 그림자
“지은 언니요… 살아있긴 해요. 하지만… 예전의 언니가 아니에요.”
수진의 말은 현우에게 칼날처럼 박혔다. 살아있다니,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녀가 살아있다니! 하지만 ‘예전의 언니가 아니다’라는 말은 또 다른 불안을 불러왔다. 수진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지은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5년 전, 그리고 2년 전, 우연히 길에서 지은을 마주쳤다는 것이었다. 수진은 지은을 붙잡았지만, 지은은 마치 낯선 사람처럼 차갑게 수진을 뿌리치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 수진은 한동안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수진은 지은의 손목에서 현우가 선물했던 은색 팔찌를 보았다고 했다. 희미하게 빛나는 팔찌가 지은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언니 옆에… 누가 있었어요. 키 크고, 좀 위압적인 분위기의 남자였는데… 그 사람이 언니를 데리고 급하게 차에 태우더군요. 언니는 마치… 그 사람에게 묶여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남자의 얼굴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수진은 말했다. 하지만 박태준이라는 이름을 흘려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이름은 현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몇 년 전, 지은의 실종과 관련해 어렴풋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스쳐 가는 정보 중 하나였지만, 이제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수진은 더 이상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저 지은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 마치 감금된 새처럼 생기가 없었다는 것만을 거듭 강조했다. 현우는 수진에게 감사를 표하고 카페를 나섰다. 빗줄기는 더 굵어졌고, 그의 마음속에도 차가운 비가 내리는 듯했다.
비 오는 밤의 회상
현우는 차 시동을 걸지 못하고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지은이 살아있다. 하지만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묶여있고, 생기가 없다. 그 말이 현우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지은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맑고 투명한 날이 떠올랐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창가에 앉아 별을 바라보던 지은. 그 모습에 현우는 홀린 듯 다가갔었다. 작은 손목에는 은색 팔찌가 빛나고 있었다. 그 팔찌는 현우가 직접 고르고 각인까지 새겨 선물한 것이었다. ‘영원히 함께’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던가. 유치하지만 진심을 담았던 그 약속은 아직도 현우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현우야,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말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맹세 같은 속삭임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하지만 약속은 깨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지은은 사라졌고, 현우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탐정이 되었다. 숱한 밤을 그녀의 흔적을 쫓으며 지새웠고,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내서, 왜 사라졌는지 묻고,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함께 웃고 싶었다.
이제 그녀의 생사는 확인되었지만, 새로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고 있었다. 박태준. 이 이름이 지은의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현우는 자신의 탐정 사무소 데이터베이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박태준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자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현우가 찾는 박태준은 단 한 명이었다. 몇 년 전, 재계에서 은밀하게 이름을 알리던 신흥 재벌이자, 어둠의 세력과도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인물. 그의 과거 행적은 깨끗하지 않았고, 그가 손에 넣은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검은 돈과 부정한 거래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현우의 눈에 들어온 한 줄의 정보. 박태준은 현재 고위 정치인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며 권력의 핵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사설 보안 회사 몇 곳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 회사들이 은밀한 ‘보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소문도 함께 따라붙었다. 혹시 지은은 그에게 ‘보호’라는 명목하에 갇혀있는 것이 아닐까. 수진이 말한 ‘묶여 있는 것 같았다’는 표현이 섬뜩하게 현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절박한 결심
현우는 차가운 시트에 몸을 기대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지난 20년간의 추적은 단지 지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의문을 풀고, 그녀를 자유롭게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다시 행복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이젠 단순한 첫사랑을 찾는 여정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영혼 조각을 되찾기 위한 고독한 전쟁과도 같았다.
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박태준. 이 이름을 그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가 어떤 인물이든,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었다. 그는 지은을 찾아야만 했다. 그녀의 어깨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걷어내야만 했다. 설령 그 길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길일지라도, 현우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탐정으로서의 모든 기술과, 인간으로서의 모든 용기를 동원해서라도, 그는 지은에게 다가갈 것이다.
시동을 걸었다. 빗소리는 여전히 거셌지만, 현우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해졌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그의 의지를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어쩌면 이 탐정 생활의 마지막 여정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은이 거기 있다면, 현우는 반드시 그녀에게 닿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예전의 지은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의미였다.
그는 운전대를 꽉 잡았다. 이제 시작이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마지막 추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