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43화

밤은 깊고, 도시의 불빛은 별들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지만, 라디오 스튜디오 안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작은 스탠드 조명 아래, 지훈은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 앉았다. 익숙한 재즈 선율이 스튜디오를 감싸고, 곧 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밤하늘 아래 수많은 이들의 귓가에 가닿을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훈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와 주신 모든 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밤, 당신의 하늘에는 어떤 별이 떠 있나요? 어쩌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지도 모를 당신만의 별을 위해, 오늘도 제가 작은 빛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그는 스튜디오 한구석에 놓인 파스텔톤의 봉투 하나를 여러 번 만지작거렸다. 봉투 속에는 ‘수아’라는 이름의 청취자가 보낸 사연이 들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봉투는 그의 심장을 자꾸만 건드리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그는 결국 그 봉투를 집어 들었다. 부드러운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닿자, 잊고 있던 아련한 향기처럼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마이크를 가까이 당겼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수아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봉투를 뜯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희미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편지를 펼쳐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지훈 DJ님. 저는 어릴 적 약속 하나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저희 동네 뒷산에는 커다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그 나무 아래 작은 오두막을 만들고, 친구와 함께 매일 저녁 별을 보러 가곤 했죠. 어느 날 밤, 친구가 제게 말했어요. ‘우리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작은 나무 조각에 새겨 버드나무 뿌리 아래 묻고, 꼭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습니다."

지훈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순간 멈칫했다. 버드나무. 작은 오두막. 별을 보며 했던 약속. 잊고 지냈던 유년 시절의 풍경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울렸다. 그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저는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 친구와는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매년 버드나무 아래 묻어둔 나무 조각을 찾아가 보곤 했어요. 혹시 친구가 저처럼 그 약속을 기억하고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요. 하지만 언제나 저 혼자였습니다. 지훈 DJ님,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 친구도 이 밤, 저처럼 별을 올려다보고 있을까요? 아니면 제가 너무 어리석은 기대를 하는 걸까요?"

지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편지 속에서 수아가 묘사하는 장소와 약속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의 기억 속 파편들과 일치했다. ‘나무 조각에 새긴 이름’, ‘버드나무 뿌리 아래 묻었던 약속’. 그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수아님, 그 친구는 분명 수아님을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죠.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잊혀진 약속들을 다시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 친구가 어디에 있든, 수아님의 이 사연이 그에게 닿아 다시 빛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훈은 말을 마치고 잠시 침묵했다. 다음 곡을 틀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수아의 사연으로 가득 찼다. 그는 숨겨왔던 오래된 상자를 떠올렸다. 그 속에는 작고 낡은 나무 조각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한쪽 면에는 서툰 글씨로 ‘지훈’이, 다른 한쪽에는 ‘수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 나무 조각을 버드나무 아래 묻으며 평생 잊지 못할 약속을 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애써 침착하게 다음 곡을 소개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스튜디오를 채웠지만, 지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쿵쿵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지훈은 스튜디오의 불을 끈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밖은 고요했고, 창밖으로는 희미하게 별들이 반짝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 사물함으로 향했다. 맨 아래 서랍을 열자, 먼지가 살짝 앉은 작은 나무 상자가 나왔다. 상자를 열자, 그 속에는 여러 추억의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편지 속 수아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서툰 글씨가 새겨진 작은 나무 조각이 놓여 있었다.

지훈은 그것을 손에 쥐었다. 차갑고 단단한 나무의 촉감은 그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지훈’ 그리고 ‘수아’. 잊고 있었던 이름이 그의 입술에서 나직이 흘러나왔다. 수아. 그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 헤어졌던 첫 친구, 첫 약속의 주인공.

그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침묵 속에 빛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빛나는 별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던 약속.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이라는 이름의 장난일까.

지훈은 나무 조각을 든 채 창밖의 별들을 응시했다. 밤은 여전히 깊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희미하지만 새로운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과연 이 사연이 그 수아였을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별이 빛나는 밤, 라디오는 꺼졌지만, 또 다른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