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은 낡은 스튜디오의 창가에 기댄 채, 봄바람이 실어오는 향기에 취해 있었다. 창밖으로는 갓 피어난 목련의 새하얀 꽃잎들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내음이 흙냄새와 섞여 실내를 채웠다. 그의 손에는 붓 대신 오래된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지만, 펼쳐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 안에 갇힌 시간의 파편들이 다시금 현재를 흔들까 두려운 사람처럼.
제주도의 외딴 마을, 시간을 잊은 듯 고요한 이곳으로 숨어든 지 벌써 5년째였다. 세상의 모든 소음과 멀어져, 오로지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만을 허락하며 지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는 얼굴과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불쑥 찾아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윤슬. 그 이름은 여전히 이안의 심장에 깊이 새겨진 문신 같았다.
“그 소식을 듣고도, 이렇게 도망쳐 버린 나를… 그녀는 용서할 수 있을까.”
이안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가 물러가고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넘어 들어왔지만, 그의 마음속 겨울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듯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식어버린 차처럼, 그의 삶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공허했다.
그때였다.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바람이 그의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던 스케치북과 오래된 서류들을 흩트려 놓았다. 종이들이 바닥으로 흩어지는 찰나, 얇게 눌린 책갈피 하나가 이안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손때 묻은 종이 사이에 끼워져 있던, 작고 낡은 나무 조각. 그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은 윤슬이 직접 깎아 만들어 준 작은 새 조각이었다.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표면이 매끄러워진 나무새는 여전히 윤슬의 따뜻한 손길과 그녀의 섬세한 예술혼을 담고 있는 듯했다. 조각의 날개에는 ‘다시 만날 날까지’라는 작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나무 조각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 아니, 잃어버렸다고 애써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떠나오던 날, 윤슬이 자신에게 건넸던 마지막 선물이었으니까.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 작은 새의 무게가 마치 지난 세월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그의 뇌리 속에는 윤슬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눈에 가득했던 슬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뻗었던 따뜻한 손길. 그리고 그날,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냈던 말.
“이안… 우리는 이제… 더 큰 책임을 지게 될 것 같아요.”
그 말의 의미를 애써 외면했던 스스로가 너무나도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는 혼자만의 어두운 굴 속으로 도망쳐 버렸고, 그 소식에 대한 확신을 애써 지우며 살아왔다.
바로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노랫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스튜디오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였다. 이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윤슬이 어릴 적부터 자주 흥얼거리던 자장가였다. 그들의 비밀스러운 추억을 담고 있는 노랫소리.
이안은 홀린 듯 창가로 다가섰다. 시선을 들어 저 멀리, 마을 어귀의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윤슬과 이안이 처음 만나 서로의 꿈을 이야기했던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다.
봄볕 아래, 윤슬이 있었다. 5년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아이. 윤슬과 아이는 함께 느티나무 아래 풀밭에 앉아 있었다. 아이는 윤슬이 흥얼거리는 노래에 맞춰 작은 손으로 땅에 무언가를 그리는 듯했다.
이안의 눈은 아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동그란 눈매, 오똑한 콧날, 그리고… 자신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미소. 아이는 무언가에 즐거운 듯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고, 그 맑고 티 없는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전해져 왔다.
“아…”
메마른 입술 사이로 겨우 터져 나온 탄식이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5년 전, 그가 외면했던 진실이, 이제는 생명력을 가진 존재가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이의 존재가 이안의 심장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자신이 외면했던 그 소식의 실체. 그는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마주했다.
나무 조각의 ‘다시 만날 날까지’라는 글귀가 손안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아이의 웃음소리, 윤슬의 자장가. 이 모든 것이 봄바람을 타고 이안의 닫힌 마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안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후회와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아니,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봄바람이 전해준 가장 아름답고도 가혹한 소식은, 그에게 다시 살아갈 이유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천천히 스튜디오 문을 향해 걸어갔다. 5년 만에,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더 이상 어둠 속이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