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나무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김지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며칠 밤낮을 헤맨 끝에 찾아낸 낡은 서점, ‘책갈피 속 시간’이라는 이름이 간판처럼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그의 심장은 북을 치듯 격렬하게 울렸다. 이 모든 고독한 추적의 끝에, 어쩌면 이곳에 수연의 마지막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서점 안은 오래된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독특한 향을 풍겼다. 빼곡히 들어찬 책장들 사이로 빛바랜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고, 그 빛줄기 속에서 작은 먼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잊힌 기억들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세요?” 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떨렸다.
책장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여자가 나타났다. 짧은 머리에 단정한 안경을 쓴 그녀는 지훈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박서진. 수연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현재까지 그가 찾아낸 수연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그녀는 지훈을 훑어보더니 이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누구…세요?” 서진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건조했다. 지훈은 그녀의 싸늘한 반응에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오랜 세월 동안 숱한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그녀에게서는 왠지 모를 벽이 느껴졌다.
“김지훈입니다. 혹시… 박서진 씨 되십니까?”
서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은 마치 그를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지훈은 망설임 끝에 말을 이었다. “이수연 씨… 친구분이시죠? 제가 수연이를 찾고 있습니다. 벌써 십 년이 넘었어요.”
수연의 이름이 나오자 서진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쳐 지나갔다. 동요, 경계, 그리고… 분노 같은 것. 그녀는 팔짱을 끼더니 카운터에 기대어 섰다. “그래서요? 그걸 저한테 왜 말씀하시죠?”
지훈의 목울대가 울컥했다.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매고 또 헤맸던가. “서진 씨가 수연이의 마지막 행방을 알 거라고 들었습니다. 제발… 수연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가 얼마나 수연이를 찾아 헤맸는지….”
서진은 픽 하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은 조롱에 가까웠다. “아직도 찾고 있었군요. 정말 지독하시네요. 수연이는요, 당신이 알던 수연이가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와서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당신 때문에 수연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세요?”
그녀의 말은 비수처럼 지훈의 심장을 찔렀다. 자신 때문에 수연이 힘들어했다니. 그들이 헤어진 후, 그는 수연이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니, 괜찮아야만 했다. 그의 이기적인 희망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무슨 잘못을….”
“다 지나간 일이에요. 굳이 꺼내서 서로 상처 줄 필요 없잖아요. 수연이는요, 이제 당신이 알던 세상에 살지 않아요.” 서진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녀는 마치 수연을 보호하려는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졌다.
지훈은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걸었다. 이 모든 시간이, 고통이, 헛될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얼굴만이라도 볼 수 없을까요? 괜찮다면… 그녀의 근황이라도 알려주세요. 저에게는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의 눈에는 잊혀지지 않는 첫사랑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맴돌았다.
서진은 잠시 침묵했다. 책장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안경알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아까보다는 희미한 연민이 섞여 있었다. “수연이는… 과거를 잊고 싶어 했어요. 당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요.”
지훈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잊고 싶어 했다니. 그녀에게 자신이 그저 잊고 싶은 과거의 한 조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단 하나, 그녀가 절대 잊지 못하는 것이 있어요.” 서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녀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곳. 도피처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던 곳. 모든 것이 힘들 때마다 찾아갔던 그 섬. 지금도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가 예전처럼 당신을 반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그 섬. 지훈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영상이 있었다. 수연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행했던, 푸른 파도가 넘실대던 그 작은 섬. 그녀가 어릴 적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곳이라고 했던, 그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그곳. 그는 그곳을 잊은 적이 없었지만, 감히 수연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그에게 모든 것을 이해하라는 듯, 혹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복잡했다. 지훈은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낡은 서점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연. 그 섬. 이제 그의 심장은 새로운 방향을 향해 뛰고 있었다. 희망과 함께 밀려오는 두려움이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녀가 정말 그곳에 있을까? 그리고 서진의 말처럼,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알던 수연이가 아닐까? 십 년의 세월이 그들의 첫사랑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야 했다. 그가 시작한 긴 여정의 끝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혹은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