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따라 빗줄기는 굵었고, 골목길은 깊은 한숨처럼 젖어들었다. 지훈은 작업등 아래 낡은 우산을 펼쳐 들었다. 살 하나가 엉뚱하게 꺾여 있었고, 낡은 천 조각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위태로웠다. 오랜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우산을 고쳐왔지만, 가끔은 이렇게 고장 난 우산 하나가 그 모든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빗방울이 작업실의 낡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을 끌어안은 자장가 같았다. 지훈은 뭉툭해진 손가락으로 살을 조심스럽게 펴고, 망가진 경첩을 갈아 끼웠다. 그의 손놀림은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숙련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빗소리에 묻혀버린 듯한, 오래된 회한의 그림자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낡은 작업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한 줄기 차가운 바람과 함께 서윤이 들어섰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늘 그렇듯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 촉촉하고 애처로웠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은 수많은 밤과 낮,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강물처럼 깊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늦었죠?” 서윤의 목소리는 빗소리 속에서도 맑게 울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처럼 희미한 불안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오래되고 빛바랜 상자였다.
지훈은 작업하던 우산을 내려놓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그 안에 담긴 흔들림은 숨길 수 없었다. 서윤이 그 상자를 들고 찾아올 때는 늘 예측할 수 없는 파동이 일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빗물이 스며들어 축축한 나무 향이 작업실을 채웠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다 낡아버린 작은 오르골이 들어 있었다. 태엽은 끊어져 있었고, 표면은 여기저기 긁히고 색이 바래 있었다. 한때 아름다웠을 선율은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지훈의 시선이 오르골에 닿는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잊고 지냈던, 아니 애써 외면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것은 그들이 오래전, 함께 꾸었던 작은 꿈의 조각이었다. 결혼식 선물로 주었던,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게 들려줄 노래를 담자고 약속했던 오르골이었다.
“이걸… 어떻게….” 지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서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눈빛 속에는 슬픔과 후회, 그리고 어쩌면 오랜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
서윤은 오르골을 손에 들고 조용히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이걸 가져왔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빗소리에 거의 묻힐 뻔했다. “이 낡은 오르골을 가지고 와서, 고쳐달라고…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지훈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 아이?’ 그는 문득 최근 들어 자주 작업실에 찾아와 찢어진 우산들을 맡기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해맑은 미소를 지녔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눈빛을 가진 아이. 자신에게 ‘아저씨, 아저씨는 뭐든지 고칠 수 있죠?’라고 묻던 아이. 그 아이가 늘 가지고 다니던, 손때 묻은 작은 빨간 우산을…. 그 아이의 얼굴과 서윤의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그의 온몸이 전율했다.
서윤은 지훈의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하며,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지훈 씨, 그 아이… 수아예요. 우리 딸….”
지훈의 손에서 낡은 우산 살이 툭 하고 떨어졌다.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골목길은 한순간에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심연이 되었다. 그의 눈앞에는 수없이 고쳐온 우산들처럼, 이제 막 부서져버린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딸이라니.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니. 133화의 비는, 그렇게 그들의 굳게 닫혔던 비밀의 문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