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늘 그랬듯이 늦은 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낡은 스탠드만이 어둠을 가르고 그의 지친 얼굴을 비췄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헤아릴 수 없는 자료들을 뒤졌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세라의 흔적은 언제나 희미한 안개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134번째 밤이 또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졸업 앨범이 펼쳐져 있었다. 빛바랜 사진 속 스무 살의 세라는 여전히 싱그러운 미소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미소가 때로는 가슴을 저미는 통증이 되었고, 때로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 그는 앨범 속 세라의 사진 옆에 적힌 손글씨에 시선을 멈췄다. 당시 친구들이 장난삼아 남긴 낙서들 사이에서, 유독 세라의 글씨체로 쓰인 작은 메모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꼭 그곳에 가고 싶어. 별들이 쏟아지는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
그는 그 메모를 보며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었다. 아, 그랬었지. 졸업을 앞두고 꿈 많던 시절, 세라는 자주 알 수 없는 별자리나 잊힌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특히, 어느 오래된 동화책에서 읽었다며 ‘별똥별이 떨어지는 언덕의 오두막’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그때는 그저 낭만적인 소녀의 상상이라고만 생각하고 흘려들었었다. 현실적인 길을 가던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꿈이었다.
지훈은 메모를 따라 손가락으로 사진을 쓸었다.
별들이 쏟아지는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
그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수십 년간 세라의 발자취를 쫓으며, 그녀가 남겼을 법한 모든 물리적인 단서에만 집착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단서는 그녀의 꿈과 이상 속에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현실을 살아가던 자신과는 달리, 세라는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람이었으니.
그는 서둘러 책꽂이 깊숙이 박혀있던 낡은 상자를 꺼냈다. 세라가 남긴 물건들을 따로 모아둔 상자였다. 빛바랜 편지들, 말린 꽃잎 몇 개, 그리고 오래된 책 한 권.
책은 겉표지가 다 헤어진 채였지만, 제목은 선명했다. ‘잃어버린 별자리 이야기’. 어린 시절 세라가 가장 아끼던 책이었다. 그녀는 이 책을 읽어주며 밤하늘의 이야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지훈은 책을 펼쳤다. 책 속에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세라의 작은 메모들이 빼곡했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시기, 특정 별자리의 전설, 그리고…
한 페이지에 볼펜으로 작게 그려진 스케치가 있었다. 언덕 위에 작은 오두막 그림. 그리고 그 아래, 지명처럼 보이는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청월재(晴月齋)’.
청월재. 그는 이 지명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래된 절 이름인가? 아니면 시골의 작은 서당 같은 곳일까?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희미한 기대감이 온몸을 감쌌다. 134번째의 밤에, 잊혔던 단서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는 즉시 노트북을 켜고 ‘청월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근처, 강원도, 제주도… 전국 팔도를 뒤졌지만, 그 이름의 흔적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낙담하려는 찰나, 그는 문득 세라가 책에 메모했던 별자리 이야기를 떠올렸다. 특정 별자리가 가장 잘 보이는 지역, 밤하늘 관측에 좋은 장소…
수십 년 전의 과학 잡지 기사 하나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 폐교가 된 한 분교의 작은 천문대’. 기사에는 학교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위치를 유추할 수 있는 지리적 단서들이 있었다.
지훈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피로에 절어있던 몸이 순식간에 활력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그는 벽에 걸린 전국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기사에 나온 단서들을 조합해 그 폐교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래된 산자락 깊은 곳,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작은 마을 근처…
그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어쩌면 세라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꿈의 장소로 도피했던 것일지도 모랐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지훈은 차 키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낡은 상자 속에서 발견된 ‘잃어버린 별자리 이야기’ 책을 옆좌석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창밖으로는 아직 어둠이 가득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랜만에 희망의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는 미지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서, 세라가 남긴 마지막 별자리 지도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