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727화

세상이 잠드는 시간, 도시의 가로등마저 흐릿해지는 골목 한 귀퉁이에는 늘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있었다. 간판조차 없어 얼핏 보면 그저 오래된 상가 건물처럼 보이지만, 그곳에는 수천, 수만 개의 이야기가 응축된 공기가 떠다녔다. 누군가는 이곳을 ‘환상의 보석상’이라 불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추억의 도서관’이라 속삭였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그곳의 진짜 이름은, ‘꿈을 파는 상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상점의 727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는 밤이었다.

점포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한밤중에도 어둠이 찾아들지 않는 이상한 공간 안으로, 허리 굽은 노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김 할머니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두 눈에는 짙은 그리움과 함께 미처 닳지 않은 소녀의 순수가 함께 빛났다. 그녀는 이곳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의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웠고,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오셨군요, 할머니.”

상점 깊숙한 곳, 낡은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있던 점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없을 만큼 젊고, 동시에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듯이 늙어 보였다. 은은한 램프 불빛 아래, 그의 눈빛은 잉크처럼 깊었고,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오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상점 안은 알 수 없는 향기로 가득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 희미한 꽃향기, 그리고 분명하지 않은 어떤 달콤하면서도 아련한 냄새. 사람들은 그것을 ‘꿈의 향기’라고 불렀다.

김 할머니는 익숙하게 삐걱이는 의자에 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녀는 평생을 간직해 온 비밀을 꺼내 놓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점장님… 오늘은… 조금 다른 꿈을 사러 왔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결심이 배어 있었다.

점장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는 고객의 마음이 스스로 열리기를 기다리는 데 익숙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 겹겹이 쌓인 마음의 짐을 안고 오는 법이었다.

“제게는…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지훈이라고… 아주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죠.” 할머니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마치 그곳에 지훈이 서 있는 것처럼.

“저희는 전쟁통에 헤어졌습니다.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평생을 그를 기다렸죠. 그리고 지금껏, 저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다린 것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은 것도… 모든 것이 옳았다고 믿었어요.”

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흔히 듣는, 잊힌 시대의 애틋한 서사였다.

“하지만… 가끔은요. 아주 가끔은 말입니다… 만약, 만약 그때 전쟁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헤어지지 않고, 평범하게 함께 늙어갔다면… 과연 지금의 저처럼, 그를 평생 가슴에 묻고 그리워하는 것이 최선이었을까요?” 할머니의 눈가에 주름진 눈물이 고였다. “저는… 후회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지 못한 그 삶의 조각을 잠시나마 보고 싶어요. 그 선택이… 과연 저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그냥 한번만이라도 겪어보고 싶습니다.”

그녀의 말은 평생 품어온 회한의 덩어리였다. 잊고 싶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길을 궁금해하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 점장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의 손이 책상 서랍을 열자, 그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수정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정구 안에는 무수한 빛의 실타래가 엉켜 있는 듯했다. 그것은 가능성의 실타래였다.

“할머니께서 찾으시는 것은 ‘이면의 꿈’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삶의 단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이 꿈은 현재의 기억을 지우지도, 과거를 바꾸지도 못합니다. 단지… 선택하지 않은 길의 잔향을 맡게 할 뿐입니다. 그 잔향은 때론 더욱 짙은 그리움이 될 수도 있고, 때론 깊은 평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오롯이 할머니의 마음이 결정할 것입니다.” 점장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경고와 같은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김 할머니는 수정구를 응시했다. 그 안에서 어렴풋이 어린 시절의 푸른 들판과 냇물이 반짝이는 듯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평생이 이 순간을 향해 걸어온 것만 같았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보고 싶을 뿐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점장은 수정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할머니의 손이 닿자마자, 수정구는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할머니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상점 안의 모든 빛이 꺼졌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오랜 잠에 빠져드는 아기처럼 평온해 보였다.

* * *

눈을 떴을 때, 김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나!’ 하고 탄성을 질렀다. 낡은 상점의 벽 대신, 눈앞에는 햇살 가득한 작은 부엌이 펼쳐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붉은 기와지붕이 이어진 한옥 마을이 보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정겹게 귀를 간지럽혔다. 창가에 놓인 도자기 화병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소박하게 피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진 피부 대신, 뽀얗고 탄력 있는 젊은 여인의 손이 보였다. 놀라 거울을 찾으려던 찰나, 등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벌써 일어났소? 어젯밤 잠 못 이루더니.”

그 목소리… 잊을 수 없는, 꿈에서도 그리던 그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녀의 꿈속에 살던 지훈이 서 있었다. 20대 후반의 젊은 얼굴, 맑게 빛나는 눈동자, 약간은 헝클어진 머리칼, 그리고 그녀를 향해 세상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가.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은커녕, 전쟁의 상흔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지훈은 놀란 듯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꿈을 꾸었기에 아침부터 그리 서럽게 우시오? 아니면 간밤에 내가 또 당신 속을 썩였나?”

그녀는 고개를 젓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단단한 팔, 따뜻한 온기, 가슴에서 울리는 익숙한 심장 소리. 이 모든 것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풍기는 비누 향기와 흙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에서, 그와 함께 가정을 꾸린 삶 속에서.

그녀는 그날 하루를, 아니 어쩌면 꿈속의 영원한 시간을 보냈다. 지훈과 함께 텃밭을 일구고, 장에 가서 만 원짜리 반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함께 지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해 질 녘 마루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아름다운 일상이었다. 그녀의 굽었던 허리는 곧게 펴졌고, 주름졌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 찼다. 그녀는 젊은 아내이자, 어머니이자, 지훈의 영원한 연인이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이 그녀의 영혼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함께 늙어가는 꿈도 꾸었다. 지훈은 백발이 성성해져도 여전히 맑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고, 때로는 젊은 날을 회상하며 소박한 행복에 잠기기도 했다. 전쟁도, 이별도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은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해서 더욱 눈부신 삶이었다.

그 행복 속에서, 김 할머니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의 삶이 결코 후회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지훈을 영원히 기다린 그 삶이 비극적이지만은 않았음을. 그리고 그와 함께한 이 ‘이면의 꿈’ 또한, 그녀의 현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이 꿈은 그녀에게 ‘만약 그랬다면’ 하는 물음의 답을 주었고, 그 답은 그녀의 오랜 그리움에 깊은 평온을 선사했다.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구나. 어떤 길을 택했든, 결국 사랑은 사랑으로 남는구나. 그녀는 지훈의 손을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 꿈은 곧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지훈과의 사랑이 그녀의 어떤 삶 속에서도 빛났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빛은, 그녀가 살아온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찬란했음을.

* * *

김 할머니는 다시 낡은 상점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온몸이 뻐근했지만, 그 피로함조차 달콤했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더 이상 슬픔이나 후회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과 해방감, 그리고 오랜 그리움이 마침내 평온을 찾은, 축복의 눈물이었다.

점장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깊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이전의 짙은 그리움은 온화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꿈은 어떠셨습니까, 할머니?” 점장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아름다웠습니다, 점장님. 이루 말할 수 없이요.” 할머니는 흐느끼듯 웃었다. “저는 제가 늘 기다림 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꿈을 꾸고 나니 알게 되었습니다. 제 삶도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을요. 그 꿈은… 제 삶의 빈 공간을 채워주면서도, 제 삶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은 여전히 노쇠했지만,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마저도 아름답게 빛나는 듯했다. 그녀는 점장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이었다.

“고맙습니다, 점장님. 이제 저는… 정말로 그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요.”

김 할머니가 상점 문을 열고 밤의 골목으로 나섰다. 삐걱이는 문이 닫히고, 상점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점장은 창밖으로 사라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수많은 꿈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어떤 꿈은 이루어지고, 어떤 꿈은 좌절되며, 또 어떤 꿈은 이처럼, 닿지 못한 사랑에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점장은 다시 서랍을 닫고, 낡은 책상 위 램프 불빛을 조절했다. 상점 안의 향기는 더욱 짙어진 것만 같았다. 다음 고객이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그는 또 다른 꿈을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가장 깊고 솔직한 소망이 담긴 꿈을.

어쩌면 다음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 잠 못 이루는 당신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