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망설임 없이 낡은 어촌 마을의 비좁은 골목으로 발을 들였다. 해묵은 벽에 박힌 녹슨 못처럼, 그는 지난 세월의 모든 풍파를 견딘 사람처럼 보였다. 742번째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처럼 하나의 사진에서였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거친 파도를 묵묵히 받아내는 등대와 그 아래 작은 어선 한 척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사진 뒷면에, 희미하게 번진 잉크로 쓰인 이름, ‘강은서’.
그 이름은 지난 몇 달간 현우의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윤서연, 그의 첫사랑. 그녀를 찾아 헤매는 긴 여정 속에서, 수많은 단서들이 피어나고 스러져갔다. 하지만 이 사진은 달랐다. 서연이 언젠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 속 등대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애절하게 쓰인 글귀, “서연, 여기서 널 기다릴게. 은서.”
현우는 이 작은 어촌 마을, ‘해묵은 포구’에 도착했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한 이 마을은 마치 그의 기억 속 서연처럼, 아련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짠 내 섞인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는 그의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리움을 자극했다.
“강은서… 이 이름이 대체 누구를 향한 단서일까.”
그는 중얼거리며 낡은 지도를 펼쳤다. 마을의 유일한 다방이자 잡화점이라는 ‘그때 그 자리’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그곳에 이 마을의 오래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오래된 다방의 그림자
‘그때 그 자리’는 이름처럼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와 커피, 그리고 정체 모를 향초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향이 현우를 맞았다. 내부는 어둑했고, 한편에서는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락이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테이블 두어 개와 먼지 쌓인 진열장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 햇살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창가에 백발의 할머니 한 분이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어서 와요, 젊은 양반. 뭘 찾나?”
그녀는 현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미자 할머니.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현우는 할머니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혹시 이 마을에서 오래 사셨는지요?”
“그럼. 내가 이 자리에서만 칠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 마을의 돌멩이 하나하나가 나보다 젊을 거야.”
할머니는 뜨개질을 멈추고 현우를 올려다봤다. 깊게 패인 주름과 흐릿한 눈빛 속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코트 안주머니에서 빛바랜 사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 사진 속 등대가… 혹시 이 근처 등대와 비슷한가요? 그리고 혹시… 강은서라는 이름을 아시는지요?”
미자 할머니의 시선이 사진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에 찰나의 흔들림이 스쳤다. 현우는 숨을 죽였다. 수많은 길을 헤매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무관심한 시선과는 다른, 어떤 깊은 감정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등대라… 저 등대는 이 마을의 ‘마지막 등대’지. 옛날엔 저기보다 더 안쪽에 등대가 하나 더 있었어. 포구가 작았을 때 말이야. 그런데 그 등대가 사라지고 새로 지어진 게 저 등대라네. 내가 젊었을 적에.”
할머니는 사진 속 등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그 등대 너머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사진 뒷면의 희미한 글씨를 가리켰다.
“강은서… 음. 이 이름은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구먼. 아주 옛날, 외지에서 온 아이였지. 조용하고 그림을 잘 그렸던 아이.”
은서와 서연의 약속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외지에서 온 아이’. 서연이 고아였고, 여러 곳을 떠돌았다는 사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우연일까? 아니면 드디어 길고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일까?
“그 아이가… 혹시 윤서연이라는 아이와 친했는지요?”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자 할머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차가 그녀의 손에서 김을 피워 올렸다. 그녀는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서연이라… 그 이름도 참 오랜만이네. 은서는 늘 서연이를 찾아다녔지. 서연이는 병약해서 몸이 안 좋았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늘 등대 아래 바위에 앉아 먼바다를 보곤 했지.”
현우는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 속 서연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병약했지만 늘 해맑게 웃던 소녀. 그림을 좋아하고, 특히 등대가 있는 바닷가를 좋아했던 그녀. 현우는 목이 메었다. 너무나도 오래된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두 아이가… 친하게 지냈나요?” 현우가 겨우 말을 이었다.
“친했지. 자매처럼. 은서가 서연이를 참 많이 챙겼어. 서연이가 곧 떠날 거라고, 병이 깊어서…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래서 은서가 서연이를 데리고 마지막 등대에 자주 갔어. 밤늦게까지 둘이서 거기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웃고 울고… 약속을 했지. 서연이가 나중에 병이 다 나으면 꼭 다시 그 등대에서 만나자고.”
미자 할머니의 이야기는 현우의 가슴을 후벼 팠다. 사진 뒷면의 글귀가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서연, 여기서 널 기다릴게. 은서.’ 그 글귀는 단순히 만남의 약속이 아니라,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두 소녀의 절박한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럼… 강은서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서연이는… 서연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할머니는 다시 뜨개질을 시작했다. 한참을 바늘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다방 안에 울렸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오랜 슬픔을 다시 마주한 듯 깊어졌다.
“은서는… 서연이가 떠난 후에 한동안 이 마을을 떠나지 못했어. 매일같이 등대에 가서 서연이를 기다렸지. 서연이가 병이 나으면 돌아올 거라 믿으면서. 그러다 어느 날, 은서도 이 마을을 떠났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었지. 서연이처럼. 어디로 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다만, 은서가 떠나기 전,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희미한 약속의 흔적
할머니는 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흐릿했던 눈빛에 갑자기 또렷한 빛이 스쳤다.
“은서가 말했어. ‘할머니, 제가 서연이를 못 찾으면, 언젠가 서연이를 찾아줄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 제가 남긴 흔적을 따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라고.”
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742번의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실낱같은 희망이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거대한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인가요?” 현우가 겨우 물었다.
할머니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이는… 늘 하늘을 올려다봤어요. 그리고 밤하늘의 ‘그 별’을 보며 저에게 웃어줬어요. 서연이를 찾으려면… 별이 가장 빛나는 곳을 찾아가야 할 거예요.’라고.”
‘별이 가장 빛나는 곳.’
현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 문구는 서연이 어릴 적 그에게 했던 말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현우야, 우리 나중에 꼭 별이 가장 빛나는 곳에서 만나자. 거기엔 슬픔이 없을 거야.”
그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수첩 속에는 수십 년 전, 서연이 그에게 그려주었던 작은 그림이 있었다. 등대와 밤하늘, 그리고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하나의 별. 그 별 아래에는 희미하게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때는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이라 생각했던 글씨. 이제 보니 그것은 지명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어느 연구소의 이름. 그 연구소는 천체 관측으로 유명했고, 당시에는 ‘별이 가장 빛나는 곳’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미자 할머니의 눈빛은 다시 흐릿해졌지만, 현우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강은서가 남긴 흔적. 그리고 그 흔적을 따라 나타난 그에게 전해진 메시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조각들이 비로소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현우는 서둘러 할머니에게 감사를 표하고 다방을 나섰다. 짠 내 섞인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시리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멈춰있던 심장에 새로운 박동을 불어넣는 듯했다. ‘별이 가장 빛나는 곳’. 그는 이제 그곳으로 향해야 했다. 742번째 chapter의 끝에서, 현우는 마침내 새로운 희망의 길목에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