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늘 그랬듯이, 오후의 가장 부드러운 햇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든 빛은 희고 투명한 먼지 알갱이들을 춤추게 했고, 그 작은 원무(圓舞) 속에서 그 아이의 검은 털은 잔잔한 윤기를 머금었다. 녀석의 얕고 규칙적인 숨소리는 세상의 모든 불안을 잠재우는 자장가 같았다. 우리가 함께 흘려보낸 수많은 계절의 시간을 조용히 증명하는 소리였다.
나는 식어가는 커피잔을 든 채 그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컵 안의 김이 희미하게 피어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내 마음속에 내려앉은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고민은 마치 뿌리 깊은 덩굴처럼 내 생각을 칭칭 감싸고 있었다. 오래된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이 익숙한 고요함 속에 더 머물러야 할지. 정해진 답은 없었고,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심장은 한없이 작아졌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떠나고, 모든 것이 유동하는 강물 같았다. 오직 그 아이만이, 내 옆에 이렇게 변함없이 존재했다.
그 아이의 귀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내 금색 눈이 천천히 뜨였다. 햇살을 가득 담은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처럼 빛났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은 언제나 그랬듯,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는 작게 하품을 하고는 몸을 길게 늘였다. 허리를 한번 둥글게 굽히고는, 천천히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발걸음마다 느껴지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내 무릎에 앞발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촉촉한 코가 내 손등에 닿았다. 그리고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야옹,” 하고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는 질문이 담겨 있는 듯했다. ‘무엇이 너를 그토록 괴롭게 하는가?’ 나는 그 아이의 보드라운 등을 쓸어주었다. 털의 감촉은 언제나 위안을 주었다.
“그래, 답을 모르겠어, 그 아이야.”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일까? 내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 아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내 손에 제 머리를 기댔다. 그제야 나는 아주 오래전, 내가 모든 것을 잃고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던 날들을 떠올렸다. 폐허가 된 마음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문득 나타나 내 발치에 몸을 비비던 작은 그림자. 그때도 그 아이는 말이 없었지만, 그 존재 자체로 내게 삶의 끈을 다시 붙잡을 힘을 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언어가 아닌, 서로의 존재와 온기로 나누는 대화.
그 아이는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길고 깊은 시선 속에서, 나는 어떤 꾸밈도 없는 진실을 읽었다. 두려워하지 마. 혼자가 아니야. 너는 강해. 그 모든 침묵 속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들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어떤 새로운 시작이든, 어떤 이별이든, 우리는 함께 헤쳐나갈 것이라는 무언의 약속.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그 아이를 품에 안았다. 녀석의 체온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영원할 것 같은 온기. 이 작은 생명체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거대한 세상의 이치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언제나 그 아이가, 나의 길잡이처럼 함께할 것이라는 믿음.
가을 햇살이 더욱 깊어지는 창가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통해 위안을 얻고, 새로운 용기를 찾아냈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듯, 말 없는 깨달음과 깊은 사랑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제203화의 오후는 그렇게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