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밤의 따뜻한 수프 – 제247화

창밖은 이미 눈으로 뒤덮인 세상이었다. 온종일 퍼붓던 눈은 밤이 깊어질수록 그 기세를 더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먼 옛날의 아련한 속삭임처럼 들렸다. 미자는 습관처럼 창가로 다가가 손바닥을 대보았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세상은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미자의 가슴속은 쉬이 잠들지 못하는 파도처럼 일렁였다. 오늘은 그날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차가운 눈발처럼 가슴을 시리게 하는 바로 그날.

부엌 한가운데 놓인 낡은 솥에서는 뽀얀 국물이 뭉근하게 끓고 있었다. 아침부터 뼈를 고아낸 곰탕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냄새는 미자의 오랜 벗처럼 따뜻하고 묵직하게 부엌을 채웠다.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미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줄어들었다. 국자를 들어 깊은 솥 안을 휘저으니, 부드럽게 풀어진 살코기들이 뽀얗게 우러난 국물 속에서 춤을 추듯 흩어졌다.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미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시간은 그 어떤 강물보다도 덧없이 흘렀고, 그 강물이 남긴 모래톱 위에는 온갖 기억의 파편들만이 반짝였다. 그녀는 그 파편들을 하나하나 쓸어 담듯, 정성껏 끓인 곰탕에 소금 한 꼬집과 다진 파를 넣었다. 누구를 위한 국물이었을까. 어쩌면 그녀 자신을 위한 위로였을지도 몰랐다. 텅 빈 집에, 유일하게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끓는 솥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잔잔한 불빛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발걸음

그때였다.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미자는 깜짝 놀라 국자를 든 채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이 깊은 밤에, 이런 폭설 속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혹시 잘못 눌렀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다시 한번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미자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을 뒤집어쓴 준호가 서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고, 얼굴은 추위와 무언가 알 수 없는 상념으로 굳어 있었다.

“준호야, 이게 웬일이니? 이 시간에 여기까지.”

미자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준호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미자 이모, 죄송해요. 너무 늦은 시간에… 하지만 도저히 혼자 있을 수가 없어서요.”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활기 대신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미자는 얼른 그를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차가웠던 현관이 다시 미자의 온기로 채워지는 듯했다.

“앉아라, 준호야. 몸 좀 녹여. 꼬락서니가 이게 뭐니.”

미자는 준호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그를 식탁 의자로 이끌었다. 준호는 말없이 앉아, 손바닥을 비비며 얼어붙은 몸을 녹이려 애썼다. 그의 시선은 부엌 한가운데서 김을 뿜어내는 곰탕 솥으로 향했다.

“이모, 곰탕 끓이셨네요. 오늘이 그날이라서…”

준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이 이 곰탕을 참 좋아했지. 너도 앉아 있어. 따뜻하게 한 그릇 내줄게.”

곰탕 한 그릇의 위로

미자는 능숙한 손길로 밥그릇에 흰쌀밥을 담고, 뽀얀 곰탕을 가득 부었다. 잘게 썬 파와 후추, 소금 간을 한 곰탕은 단순하면서도 깊은 위로를 담고 있었다. 갓 지은 김치와 깍두기도 곁들였다. 식탁 위에 차려진 따뜻한 한 상은 눈보라 치는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아늑한 위로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뜨거울 때 먹어라. 몸이 좀 풀릴 게다.”

미자는 준호의 앞에 곰탕을 놓아주었다. 준호는 숟가락을 들었지만, 쉽사리 입에 대지 못하고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뭔가 깊은 고민에 잠겨 있는 듯했다.

“무슨 일 있니, 준호야? 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미자의 따뜻하지만 예리한 질문에 준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모… 사실은…”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미자는 그가 서두르도록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곰탕을 먹으며 기다려주었다. 곰탕의 온기가 그의 손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자, 준호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오늘… 이모가 찾으시던 서류를 다시 한번 뒤져봤어요. 할아버지 유품 정리하면서 나왔던 오래된 상자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데 거기서 이걸 찾았어요.”

준호는 주머니에서 낡고 구겨진 봉투 하나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안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과 함께 작은 노트 한 권이 나왔다. 미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사진은… 30년 전, 이 차가운 겨울밤처럼 사라져 버린 미자의 동생, 영호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노트는…

“이건… 영호 일기장 아니니? 분명 그때 찾지 못했다고 했는데…”

미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몰랐어요. 상자 바닥에 아주 깊숙이 숨겨져 있었어요. 그리고… 이 일기장에 마지막으로 쓰인 내용이…”

준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에도 슬픔과 후회가 서려 있었다. 미자는 이미 알아차린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준호의 손에서 사진과 노트를 천천히 받아들었다. 뜨거웠던 곰탕의 온기가 손끝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운 시작을 향해

사진 속 영호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시절, 이 곰탕을 가장 좋아했던 동생. 미자는 차가운 종이 위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펼쳤다. 낡은 종이에서 세월의 냄새가 났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30년간 닫혀 있던 진실의 문이, 마침내 이 겨울밤, 따뜻한 곰탕 냄새 속에서 열리려 하고 있었다.

“이모…”

준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미자를 바라보았다. 미자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 오히려 그렁그렁한 눈으로 노트를 꾹 쥐었다. 그리고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제야. 이제야 영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구나.”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자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눈보라 대신, 진실을 마주할 용기라는 따뜻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곰탕은 여전히 식탁 위에서 묵묵히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진실의 문 앞에서, 그녀는 곰탕 한 그릇이 전해주는 위로와 함께, 그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긴 겨울밤은, 새로운 시작의 전야가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