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도시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흐느껴 내리던 오후였다. 강지훈은 낡은 외투 깃을 세우고, 간판조차 희미해진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777번째 밤낮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들을 그렇게 헤매었다. 그의 탐정 사무실 벽에는 수많은 지도와 사진, 그리고 이름 모를 메모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정작 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윤은채의 흔적은 여전히 아득한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았다.
오늘의 단서는 한 장의 빛바랜 엽서였다. 십여 년 전, 한 고서점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엽서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파도 소리가 들리는 언덕 위에서’라는 알 수 없는 문구와 함께, 은채가 즐겨 그리던 별똥별 그림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 별똥별 그림 하나에 이끌려, 낡은 엽서가 발견된 고서점 주인에게 수소문하여 얻은 실마리를 좇아 이 외진 골목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가 도착한 곳은 ‘시간의 흔적’이라는 간판을 단 작은 골동품 가게였다.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로 오래된 물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이 보였다.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쿰쿰한 세월의 냄새와 함께 종소리가 그를 맞았다. 가게 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했고,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은 고작 지훈의 시선과, 그의 심장을 조여오는 묵직한 기대감뿐이었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백발의 노인이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앉아 낡은 시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엽서에 대해 물었다. 노인은 지훈의 눈빛에서 읽히는 간절함을 한 번에 알아챈 듯, 깊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 그 엽서 말이오? 아주 오래전, 누군가 고서점에 맡겼던 책 속에 끼어 있던 것을 발견했지. 특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어.”
“그 엽서를 맡긴 분을 아십니까?” 지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777번째의 질문이었지만, 매번 똑같이 떨렸다.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그 책을 맡겼던 건 이 가게의 전 주인이었지. 내가 물려받기 훨씬 전의 일이야. 하지만… 아주 드물게, 아주 가끔 찾아와서 가게 안을 조용히 둘러보고 가던 젊은 여인이 있었어. 항상 이 엽서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진 오래된 시집을 들고 다니곤 했지.”
시집. 그 단어가 지훈의 뇌리를 강타했다. 은채는 시를 사랑했다. 특히, 어느 무명 시인의 ‘별을 잃은 자의 노래’라는 시집을 애지중지했었다. 그녀는 그 시집의 여백에 자신의 생각과 그림을 깨알같이 남기곤 했다.
“그 시집, 혹시 이 가게에 있습니까?” 지훈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게 안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가게 한쪽 구석,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장으로 향했다.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자, 낡은 책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한 권 한 권 책을 살펴보았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은 마치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는 듯했다.
마침내 노인의 손이 한 권의 책에 멈추었다. 검게 바랜 가죽 표지에, 낡은 금박으로 제목이 새겨진 시집. ‘별을 잃은 자의 노래’.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시집이었다. 은채가 그토록 아끼던 시집.
노인은 조심스럽게 시집을 꺼내 지훈에게 건넸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리움의 무게가 시집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시집을 펼쳤다. 그리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그의 눈은 젖어들었다. 낯익은 필체, 옅은 연필 자국, 그리고 익숙한 별똥별 그림. 은채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페이지 여백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파도 소리처럼 밀려오겠지. 나도, 파도처럼 다시 흘러갈 거야.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아래, 희미하게 눌러 쓴 작은 주소와 함께, ‘등대 아래, 빛바랜 바다 그림이 있는 곳.’이라는 알 수 없는 문구가 더해져 있었다. 글씨는 마치 사라져가는 듯 흐릿했지만, 지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등대. 바다 그림. 새로운 시작. 모든 것이 연결되는 듯했다.
그 순간, 지훈의 눈앞에 은채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늦가을 오후, 벤치에 나란히 앉아 함께 시집을 읽던 모습.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는 소녀였다. 파도 소리를 좋아했고, 바다를 동경했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녀. 그날 이후, 지훈의 세계는 멈추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삶을 그녀를 찾는 데에 전부 바쳤다. 777화라는 긴 여정 동안 그는 수도 없이 절망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이 작은 희망의 파편들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지훈은 시집을 가슴에 품었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잃어버린 사랑의 마지막 단서이자, 그의 긴 여정의 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777화라는 숫자 뒤에 숨겨진 수많은 날들의 고독과 절망이, 이 시집 한 권으로 인해 새로운 희망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 주소… 어디인지 아십니까?” 지훈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흐느끼는 비처럼 우울하지 않았다. 그 속에는 타오르는 불꽃 같은 간절함과, 마침내 길을 찾은 자의 굳건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지훈의 손에 들린 시집을 한참 바라보더니, “아마도… 서쪽 바다, 작은 어촌 마을의 그곳일지도 모르겠군. 오래전, 이 가게의 전 주인이 아주 아끼던 그림 한 점이 있었어. 거친 파도와 낡은 등대를 그린 그림이었지. 그 그림을 팔면서, ‘이 그림이 꼭 있어야 할 곳으로 간다’고 했었어.”
서쪽 바다, 작은 어촌 마을, 등대, 그리고 바다 그림. 모든 퍼즐 조각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지훈은 시집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777번째 에피소드에서, 그는 마침내 그 아득했던 신기루의 윤곽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발걸음은, 주저함 없이 그곳을 향할 것이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그 언덕 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