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어 뺨을 스쳤다. 잠결에도 온몸을 짓누르는 먹먹한 슬픔은 어제의 것이 아니었고, 그제서야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지혜는 천장을 응시한 채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꿈에 선우가 또렷하게 나타났다. 늘 그랬듯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편에 숨겨진 깊은 외로움이 꿈속에서조차 지혜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지혜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낡은 사진 액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흑백 사진 속 선우는 스무 살의 앳된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벌써 십 년이 넘도록 선우의 웃음은 지혜의 마음속에 시들지 않는 꽃처럼 피어 있었지만, 가끔은 그 꽃잎이 한없이 시들어가려는 때도 있었다.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렸다. 옅은 허브향이 온 집안에 퍼졌지만, 마음속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유리창 너머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조용한 아침을 깨고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새벽이었다. 창틀 위로 가볍게 뛰어오른 새벽이는 맑고 투명한 초록빛 눈으로 지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혜는 피식 웃었다. 새벽이는 언제나 지혜의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새벽아, 왔니?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새벽이는 대답 대신 가느다란 야옹 소리를 내며 창문을 긁었다. 지혜는 창문을 열어주었고, 새벽이는 능숙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녀석은 늘 그랬듯 지혜의 다리 주위를 맴돌며 부드럽게 몸을 비볐다. 그 온기에 지혜의 마음이 조금 녹아내리는 듯했다.
“또 그 꿈을 꿨어. 선우가 너무 외로워 보이더라. 내가 그때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지혜는 새벽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웅얼거렸다. 새벽이는 만족스러운 듯 목을 울리며 그르렁거렸다. 지혜는 새벽이에게 따뜻한 우유 한 그릇을 내어주었다. 새벽이는 탐스럽게 우유를 핥아 마셨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지혜의 얼굴에 비로소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우유를 다 마신 새벽이는 다시 지혜의 옆으로 다가와 무릎 위에 가볍게 뛰어올랐다. 새벽이의 따뜻한 온기가 다리에 전해졌다. 녀석은 이내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지혜는 새벽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새벽이는 그 모든 이야기를 경청하듯, 때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혜를 응시했다.
“선우는 늘 웃었지만, 나는 그 웃음 뒤에 가려진 슬픔을 알아채지 못했어. 어쩌면 애써 외면했던 건지도 몰라. 내가 너무 바빴고, 내 문제에만 골몰해 있었으니까. 내가 조금만 더 선우 곁에 있었더라면… 어쩌면, 어쩌면 선우는 지금도 내 곁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지혜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오랜 시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죄책감은 시들지 않는 덩굴처럼 지혜의 심장을 조여왔다. 새벽이는 지혜의 손길에 맞춰 살짝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지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깊은 초록색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는 듯했다. 새벽이는 작게 ‘야옹’ 소리를 내며, 지혜의 손가락을 제 코로 툭 건드렸다.
그 순간, 지혜는 문득 깨달았다. 새벽이는 단 한 번도 지혜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조급해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혜는 그 속에서 늘 위로를 찾았다.
“내가 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는구나, 새벽아.”
지혜는 나지막이 말했다. 새벽이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다시 고개를 지혜의 손에 비볐다. 그 비비는 움직임 속에서, 지혜는 선우의 미소를 떠올렸다. 외로웠을 선우의 마음을 지혜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었을지라도, 선우는 늘 지혜에게 따뜻한 존재였다. 그들의 만남은 기쁨이었고, 추억은 아름다웠다. 죄책감이라는 무거운 돌을 품고 있었던 탓에, 그 아름다운 기억들마저 흐릿하게 빛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지혜는 깨달았다.
새벽이가 무릎에서 내려와 거실 창가로 향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넘어 거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새벽이는 햇살이 가장 따스하게 쏟아지는 자리에 몸을 뉘었다.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나른하게 눈을 감는 녀석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이 지혜에게도 전이되는 듯했다.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벽이 옆에 조용히 앉았다. 창밖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피어나는 봄꽃들의 향기가 희미하게 실려오는 것 같았다. 선우는 늘 봄을 좋아했다.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이야기하던 선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선우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내가 이렇게 슬픔에 잠겨 과거에 묶여 사는 것이 아니었을 거야.’
지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감쌌다. 잃어버린 친구를 향한 죄책감은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지만, 그 무게는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듯했다. 새벽이의 존재가 지혜에게 가르쳐준 것은,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것만큼이나 남아 있는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지혜는 천천히 눈을 뜨고 새벽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햇살 속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새벽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고마워, 새벽아. 네 덕분에… 이제 선우를 조금 다른 마음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
새벽이는 대답 대신, 지혜의 손길에 맞춰 작게 몸을 웅크렸다. 지혜는 그제야 마음속에서 어둠이 걷히고, 한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선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혜의 기억 속에서, 그리고 새벽이가 가져다주는 평화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의 햇살은 더욱 강렬해졌고, 지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는, 선우가 좋아했던 봄날처럼, 시들었던 마음을 다시 피워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처럼 새벽이가 함께할 것이다. 지혜는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었지만, 새벽이와 함께라면, 그 어떤 길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