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산등성이는 온통 불타는 듯 붉은색과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없이 많은 세월이 겹겹이 쌓인 듯, 묵직한 공기가 나뭇가지 사이를 휘감았다. 이안은 붉게 물든 단풍나무 숲을 헤치며 고봉사에 도착했다. 낡은 목조 문에는 오래된 이끼가 덮여 있었고, 빗물에 씻긴 흔적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었다.
제834화에서 해독했던 고서의 마지막 구절, ‘붉은 노을 아래, 세월을 견딘 목련이 지키는 곳. 낙엽궁서의 길은 오직 한 떨기 늦가을 꽃만이 안다.’ 이 구절만이 그를 이곳, 외부와 단절된 고봉사로 이끌었다. 그의 심장은 북소리처럼 격렬하게 울렸다. 800년에 걸친 가문의 숙원, 그 끝이 과연 이 고즈넉한 사찰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사찰 안은 고요했다. 바람이 불어 낙엽이 굴러다니는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절이었지만, 곳곳에 배어있는 고풍스러운 멋은 범상치 않았다. 특히 경내 중앙에 우뚝 선,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목련나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미 겨울을 준비하는 듯, 잎은 대부분 떨어져 앙상했지만, 그 웅장함은 여전했다. 어쩌면 저 나무가 낙엽궁서를 지켜온 목련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이안의 전신을 감쌌다.
그때였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작은 암자의 문이 열리고, 한 노파가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가 굽고 머리칼은 눈처럼 희었으며, 깊게 패인 주름은 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묘하게 깊고 아련했다. 이안은 그 눈빛에서 오래된 슬픔과 기다림을 동시에 읽어냈다.
“오셨군요.”
노파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또렷했다.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마치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송화 할머니 되십니까?”
이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이 고봉사의 유일한 거주자는 송화라는 노파였다. 낙엽궁서와 관련된 마지막 수호자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저몄다.
노파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허나… 내 기억은 이제 흐릿한 단풍잎처럼 바스러지고 있소.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을 것이오.”
이안은 절박한 심정으로 노파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저는… 이씨 가문의 후손, 이안입니다. 낙엽궁서를 찾고 있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송화 할머니는 이안의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마치 그의 눈빛 속에서 먼 옛날의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이씨 가문… 그래. 잊고 살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이지. 그대가 800년 전의 붉은 눈물을 마음에 품고 왔구나.”
그녀의 말이 이안의 가슴을 후벼 팠다. 붉은 눈물. 가문이 겪었던 억울한 참극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노파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이안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할머니, 제발… 아시는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송화 할머니는 힘겹게 몸을 돌려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그녀를 따랐다. 암자 내부는 간소했지만, 한쪽 벽면에는 낡고 빛바랜 그림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단풍잎으로 가득한 숲속의 작은 암자를 그린 그림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 그림 속의 암자는 지금 이들이 있는 고봉사와 흡사했다.
“이 그림은…” 이안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낙엽궁서가 숨겨진 곳을 그렸지. 나의 조상이, 그리고 그 조상의 조상이 대대로 그려온 기록화라오.” 송화 할머니는 그림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림 속에는 목련나무 아래,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작은 들꽃 한 송이가 유독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늦가을에 피는, 마치 작은 등불 같은 꽃이었다.
“저 꽃… 제834화에서 봤던 그 늦가을 꽃입니까?” 이안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고서에서 언급된 ‘한 떨기 늦가을 꽃’이 바로 이것이었다.
송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꽃은 오직 그대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자에게만 길을 알려줄 것이오. 허나, 그 길은 고통으로 가득할 터이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이오.”
그녀의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고통이라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때였다. 암자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세했지만, 이안의 예민한 감각은 그것이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님을 알아챘다. 누군가 숨어들고 있었다.
“할머니… 잠시만요.” 이안은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붉게 물든 단풍나무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언뜻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강태호였다. 제830화에서 이안의 뒤를 쫓던 그림자, 그가 기어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송화 할머니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경고의 빛이 스쳤다. “시간이 없소. 놈들이 왔어. 어서 낙엽궁서를 찾아야 해.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래된 우물과 그 안의 그림자.”
“오래된 우물…?” 이안은 암자를 나서며 주위를 살폈다. 사찰 경내 한쪽에 덮개가 씌워진 낡은 우물이 보였다. 그곳으로 향하려는데, 강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군, 오랜만이군. 보물을 찾으러 이곳까지 온 건가? 역시 자네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강태호는 단풍나무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몇 명 더 따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강태호! 이 어르신에게서 떨어져!” 이안은 몸을 돌려 송화 할머니를 보호하듯 앞에 섰다. 그녀는 이미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낙엽궁서가 이곳에 있다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지. 800년을 숨겨온 그깟 비밀, 이제 세상에 드러낼 때가 됐어.” 강태호는 조롱하듯 웃었다.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어!”
이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때 송화 할머니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늦가을 꽃… 바위틈… 우물 안의 그림자… 낙엽이 붉게 물드는 깊은 곳… 시간은 흐르고… 다시… 흐르고…”
할머니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지만, 이안은 그녀의 눈빛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읽었다. 우물 안의 그림자,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흐른다’는 말… 그것은 과거의 시간, 800년 전의 그 날을 의미하는 것일까?
강태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르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낙엽궁서가 어디 있는지 말씀하시죠. 아니면… 불편해지실 겁니다.”
이안은 결심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강태호에게 돌진하는 척하며 시선을 끌었다. 강태호의 부하들이 이안에게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난투가 벌어졌다. 그 혼란 속에서 이안은 기회를 엿보았다.
할머니의 말, ‘늦가을 꽃, 바위틈’. 경내 중앙의 목련나무 아래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붉은 단풍잎이 수북이 쌓인 그 바위틈 사이를 이안은 미친 듯이 뒤졌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에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흙과 낙엽으로 덮여 있던 작은 틈새, 그 안에 자그마한 석등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석등의 그림자 아래, 붉은 단풍잎 사이에서 마치 기적처럼 피어난 듯한 작은 꽃 한 송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늦가을에 피는, 희귀한 ‘불씨꽃’이었다.
불씨꽃… 800년 전, 이씨 가문의 조상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 희망을 불태우며 피어났다는 전설의 꽃. 그 꽃잎은 마치 붉은 숯불처럼 보였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꽃잎 하나를 만졌다. 꽃잎에 손이 닿는 순간, 석등의 옆면에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상형문자였다. 이안은 그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물 안으로 내려가는 방법과, 시간의 순환을 의미하는 암호였다.
강태호의 부하 하나가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이안은 몸을 피해 우물 쪽으로 내달렸다. “낙엽궁서는… 우물 안에 있어!”
그의 외침에 강태호와 부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물로 향했다. 이안은 재빨리 덮개를 열었다. 우물 안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할머니의 말대로 ‘우물 안의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안은 직감했다. 진실은 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 함정에 걸릴 셈이냐!” 강태호가 소리쳤지만, 이안은 이미 우물 안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끝없이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순간, 그는 800년 전 조상들의 비명과 눈물을 들은 것만 같았다.
우물의 바닥은 예상과 달리 물이 없었다. 대신, 미끄러운 흙바닥에 떨어졌고, 주변에는 낡은 벽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희미하게 보였다. 벽면을 따라 고대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 마치 시간의 틈새처럼 느껴지는 곳에서 붉은 단풍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를 위해 남겨둔 이정표 같았다.
이안은 손전등을 켰다. 붉은 단풍잎이 가리키는 곳은 작은 틈새였다. 간신히 몸을 굽혀 들어간 좁은 통로를 지나자, 그 앞에는 고요하고 웅장한 공간이 나타났다. 벽면에는 수많은 고문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중앙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석함이 놓여 있었다. 그 석함 위에는 붉은 비단에 쌓인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낙엽궁서.
이안은 조심스럽게 석함으로 다가갔다. 두루마리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찾았군. 800년의 기다림 끝에… 내 손에 들어올 운명이었어.”
강태호였다. 그는 이안의 뒤를 따라 우물 속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그의 눈은 탐욕과 승리감으로 번들거렸다. 이안은 낙엽궁서와 그를 둘러싼 어둠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다음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