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거실, 창밖으로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지영은 손에 든 따뜻한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는 토리가 곤히 잠든 듯 숨소리를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알고 있었다. 토리는 언제나 깨어있다는 것을. 그녀의 마음속 미세한 흔들림까지 감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또 그 친구야?”
토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짖는 소리도,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아닌, 명확하고 또렷한 사람의 말소리. 수년째 지영의 유일한 비밀이자 가장 소중한 존재인 토리의 목소리였다. 지영은 눈을 감았다. 언제나 적응되지 않는, 하지만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기이한 현실이었다.
“응, 혜진이.”
지영의 목소리에도 피곤이 잔뜩 묻어났다. 오늘 오후, 오랜만에 혜진이 찾아왔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친구였지만, 최근 들어 혜진의 방문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문 속에는 언제나 불편한 시선과 질문들이 따라붙었다.
“오늘도 그런 말을 하더라고. 토리가 보통 강아지가 아니라고. 너무 영리해서 소름이 끼친대.”
토리는 지영의 발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앞발로 지영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걱정조차 없었다. 오히려 지영을 시험하는 듯한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그냥 웃어넘겼지. ‘얘가 얼마나 장난꾸러기인데. 그냥 훈련을 잘 시킨 거지.’ 하면서.”
지영은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토리의 등을 쓰다듬었다. 토리의 털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 조그만 생명체가 세상의 어떤 인간보다도 깊은 지혜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경이로웠고, 때로는 그녀를 짓눌렀다.
“근데, 혜진이가 이상해. 자꾸 나랑 토리를 관찰하는 것 같아. 예전엔 안 그랬잖아. 왜 자꾸 우리 집에 오는 걸까?”
토리는 고개를 들고 지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깊은 갈색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 “인간들은 때때로 진실의 틈새를 무의식적으로 들여다보곤 해. 특히 사랑하는 이들의 주변에서.”
“무슨 말이야? 혜진이가 내가 뭘 숨기는 걸 안다는 거야?”
지영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동안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뒤척였던가.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토리가 사라질까 봐, 아니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봐. 그녀의 삶은 토리의 존재로 인해 풍요로웠지만,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았다.
“아니, 아직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의 직감이 너를 향하고 있는 건 맞아. 너의 불안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거야, 지영아.”
토리의 말이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영은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혜진이 던지는 은근한 질문들, 예를 들면 “지영아, 너 요즘 좀 힘들어 보여. 무슨 일 있어?” 혹은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아? 토리가 있어서 다행이다.” 같은 말들이 단순한 안부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표정과 말투, 시선이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던 것일까.
“나… 내가 너무 티를 냈나?”
“너는 괜찮아. 단지… 그 비밀의 무게가 너를 좀 지치게 한 것뿐이야.” 토리는 다시 지영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그 한마디가 지영의 마음속 굳은살을 건드렸다. 토리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세상의 어떤 위로보다 컸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불안감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토리를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것은 지영의 숙명과 같았다.
“만약 혜진이가… 알게 된다면?” 지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식는 듯했다. 토리는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수많은 고비를 넘겨왔잖아. 기억나? 네가 어릴 때, 우체부 아저씨가 날 간식으로 유인하려 했을 때 내가 ‘저는 고기 맛을 더 좋아해요!’라고 외쳤던 거.”
토리의 말에 지영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래전, 토리가 아직 말을 하는 것에 서툴고, 지영 또한 그 비밀을 다루는 데 미숙했던 시절의 에피소드였다. 다행히 그때 우체부 아저씨는 토리의 말을 듣지 못했고, 지영은 상황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겨왔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땐 정말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어.”
“하지만 우린 잘 해냈지. 앞으로도 그럴 거야.” 토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지영은 토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토리의 온기가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었다. 그녀는 이 작은 생명체와의 비밀스러운 유대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 비밀은 그녀의 삶을 고독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 고독 속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혜진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는 가시처럼 느껴졌다. 오늘 혜진은 집에 돌아가기 전, 현관문을 나서면서 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토리야, 다음에 이모 오면 또 똑똑한 모습 보여줘야 해? 혹시 이모 없을 때 언니한테 비밀 이야기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지?”
지영은 그때 혜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녀의 눈빛에는 묘한 탐색이 서려 있었던 것 같다. 지영은 토리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이 비밀이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만약 이 비밀이 더 이상 지켜질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토리는 지영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