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깊고,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도시의 빛조차 가려낼 수 없는 깊이로 박혀 반짝이는 작은 점들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고요했다. 윤서는 창가에 기대어 차가운 유리창에 뺨을 댔다. 작은 탁상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디제이 지훈입니다. 오늘 밤도 이렇게 수많은 별들 아래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계실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별빛 한 조각을 녹여낸 듯, 불안한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온기가 있었다. 윤서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따라 그 별들이 유난히 사무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잃어버린 약속의 별
“첫 번째 사연입니다. 서울의 김지수님께서 보내주셨네요.” 지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디제이님, 저는 잊혀진 약속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열두 살 여름, 쏟아지는 별똥별 아래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비밀을 묻고, 영원히 변치 말자고 맹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별에 이름을 붙여주고, 나중에 혹시라도 길을 잃게 되면 그 별을 보고 서로를 떠올리자고 했어요. 이제 그 친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만 이 밤하늘 아래에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윤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열두 살 여름. 쏟아지던 별똥별. 그리고 친구. 그녀의 눈앞에 흐릿한 옛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하얗게 바랜 사진첩 속 페이지처럼, 아련하지만 선명한 장면이었다.
‘윤서야, 저기 저 별은 우리만의 별이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
‘아니야, 하준아! 저기 저 밝은 별이 우리 별이지!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돼서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저 별을 보면 서로 생각하기로 약속!’
어린 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붉어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윤서와 하준은 자신들만의 암호를 정하고, 작은 유리병에 편지를 담아 뒷동산 밤나무 아래에 묻었다. ‘만약 우리가 길을 잃는다면, 이 라디오 방송을 듣자. 분명 서로의 마음이 닿을 거야.’ 그렇게 둘은 엉뚱하면서도 진심 가득한 맹세를 했었다.
어릴 적에는 그 약속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은 무심하게도 많은 것을 앗아갔다. 중학교 진학 후 하준은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고, 그들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초등학교 졸업 앨범 한 구석에 적힌 하준의 이름 석 자와 삐뚤빼뚤한 메시지만이 그 시절의 유일한 증거였다. 윤서는 한 번도 그 약속을 잊은 적이 없었지만, 먼저 연락할 용기가 없었다. 혹시나 하준은 이미 자신을 잊었을까 봐, 혹은 자신만 과거에 갇혀 바보처럼 굴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별에게 보내는 메시지
“김지수님의 사연은, 아마 많은 분들의 마음을 울렸을 것 같습니다.” 지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잃어버린 관계는 사실, 잃어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잠시 어둠 속에 숨어 있을 뿐이죠.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요.”
윤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 중, 어느 것이 하준과 그녀가 이름 붙였던 별이었을까. 이제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모든 별들이 그 약속의 증인이 되어주는 듯했다.
“오늘 밤, 김지수님께는 이 노래를 띄워드립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이 방송을 듣고 있을지 모를 김지수님의 친구분께도요.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현재는 언제든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별들에게 물어봐. 어린 시절, 하준과 윤서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였다. 그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윤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숨죽여 울다 보니, 잊고 지냈던 오래된 상자가 떠올랐다. 이사를 오며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상자였다.
노래가 끝나고, 지훈의 마지막 멘트가 이어졌다.
“잃어버린 약속의 별이 혹시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면, 오늘 밤 그 별을 향해 조용히 이름을 불러보세요. 어쩌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별이 다시 빛을 발할지도 모릅니다.”
윤서는 라디오를 끄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고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먼지 쌓인 상자 속에서 그녀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작은 유리병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열두 살 하준과 윤서의 희망 가득한 메시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미래의 우리에게.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우리는 꼭 만나자. 이 라디오 방송에서 만나. 별이 빛나는 밤에.’
윤서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 별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하준도 이 밤, 어딘가에서 같은 별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라디오 사연 게시판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디제이 지훈님, 열두 살 여름의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