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273화

이안은 낡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초가을 햇살을 응시했다. 먼지조차 금빛으로 반짝이는 고요한 순간이었다. 며칠 전의 격렬했던 시간의 뒤틀림과 알 수 없는 추격자들의 그림자는 잠시 잊은 듯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고장 난 회중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지 못한 채 삐걱거렸고, 그 소음은 이안의 영혼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손안에 든 낡은 회중시계는 차가웠다. 어디서부터 그에게 온 것인지, 왜 자신에게 이토록 강렬한 끌림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떤 위급한 상황 속에서 본능적으로 품에 안게 되었을 뿐이었다. 뚜껑을 열자 멈춰버린 시침과 분침이 영원히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닳고 닳은 시계 테두리에는 눈으로는 쉽게 식별하기 어려운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안은 손끝으로 그 문양을 천천히 따라갔다. 마치 꿈결처럼 희미하고 익숙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머릿속으로 번져 나갔다.

그 순간, 눈앞이 일렁였다. 흐릿한 안개 속에서 한 점의 빛이 터져 나왔다. 쨍한 햇살 아래 피어 있던 이름 모를 붉은 꽃, 그리고 그 꽃잎 위로 투명하게 맺힌 이슬방울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정원이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에 맴돌았다. 그 소리는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해서 이안의 얼어붙은 심장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손이 나타났다.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손등. 그 손은 이안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온기가 파고들었다. 마치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듯, 두 손은 단단히 맞잡혔다. 이안은 그 손의 주인을 찾으려 고개를 들었다. 안개는 걷히지 않았지만, 흐릿한 윤곽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잔잔한 미소를 띤 입술이 보였다. 그 사람은 나지막이, 하지만 분명하게 속삭였다.

“이안… 우리는 약속했어요.”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원도, 웃음소리도, 따스한 손길도. 오직 텅 빈 공허함만이 이안을 휘감았다. 그는 숨을 헐떡였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마치 자신의 존재의 한 부분이 통째로 뜯겨 나간 듯한 고통이었다. 그는 애써 그 기억의 조각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히지 않았다. 오직 한 단어만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유진…”

이름이었다. 누구의 이름인지, 왜 이토록 가슴을 저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어떤 감정의 보물상자를 열어젖힌 듯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에 휩싸였다. 눈물이 차올랐다. 이 기억을, 이 사람을, 이 감정을 왜 잊고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망각이 자신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갔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이안 씨? 괜찮으세요?”

문득 들려오는 수아의 목소리에 이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환상 속에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수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가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회중시계는 그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얼굴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어요?” 수아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손길은 따뜻했고, 그 따스함이 이안의 차가운 몸에 조금씩 온기를 불어넣었다.

이안은 수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경험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심장 깊숙한 곳에서 어떤 거대한 벽이 무너져 내렸음을 느낄 뿐이었다.

“유진…” 이안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자, 그의 심장은 다시 한번 격렬하게 울렸다. 이 이름은 단순한 기억의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잊힌 시간의 열쇠처럼, 이안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을 가리키는 듯했다.

수아는 이안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고통 어린 표정에서, 그 이름이 가진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이안의 손에 들려 있던 회중시계가 바닥에서 섬광을 내뿜으며 작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침과 분침이 갑자기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계의 낡은 표면 위로 또 다른 희미한 글자들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