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92화

차가운 비가 내린 뒤의 밤은 유난히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아직 젖은 나뭇잎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조차도 오늘은 젖은 솜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나는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오래된 일기장을 말없이 응시했다. 페이지마다 배어 있는 지난 시간의 흔적들이 손끝에서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늘 그랬듯 인기척도 없이, 그림자처럼 새벽이가 창틀 위에 앉아 있었다. 녀석의 짙은 회색 털은 빗방울을 머금은 듯 촉촉했고,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작은 등불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새벽이를 맞았다. 녀석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창문을 넘어와 익숙하게 내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그 무게감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새벽아, 왔니.”

나는 나직이 속삭였다. 새벽이는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녀석의 따뜻한 온기가 차가웠던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무거웠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림자들이 밤이 깊어질수록 선명하게 떠올라 나를 맴돌았다.

“요즘 들어…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 내가 미처 붙잡기도 전에 말이야. 가끔은 내가 멈춰 선 채로 혼자만 뒤처지는 기분이야.”

나는 새벽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내리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새벽이는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손에 뺨을 비볐다. 녀석은 언제나 내 말을 이해하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녀석은 내가 내뱉지 못한 말들까지도 읽어내는 것 같았다.

새벽이는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저 멀리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 깊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세월의 지혜와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녀석은 작은 앞발을 들어 내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마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네 말이 맞아… 혼자라고 생각하면 더 힘들겠지. 하지만 때로는 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애쓰는 것 자체가 버거울 때가 있어.”

새벽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조용히 ‘야옹’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여느 고양이의 울음소리와는 달랐다. 마치 오래된 속삭임 같기도 하고, 잊고 있던 멜로디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오래전 할머니가 해주시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흐르는 강물도, 떨어지는 빗방울도 결국은 제 갈 길을 찾아가며 새로운 모습을 만든다는 이야기. 멈춰 서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모든 것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

새벽이의 눈빛이 다시 한번 내 눈과 마주쳤다. 녀석은 작은 코를 내 뺨에 비볐다. 그 작은 행동에서 나는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붙잡으려 애썼던 것인지도 모른다. 변하는 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과거에 갇혀 홀로 아파했던 것인지도. 새벽이는 내가 놓지 못하고 있던 어떤 끈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 그래야 하는 걸까. 나도 이제, 조금은 달라져야 할 때일지도.”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새벽이는 만족스러운 듯 다시 무릎 위로 내려와 웅크렸다. 녀석의 가르릉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밤은 여전히 깊었지만, 더 이상 고요함이 나를 짓누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새로운 시작의 작은 속삭임을 들은 것 같았다.

새벽이는 나의 흔들리는 그림자 사이에서 늘 그렇게 존재했다. 마치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등대처럼. 그리고 나는 오늘 밤도 녀석과의 대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들을 발견했다. 이 길고양이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