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바람이 휩쓸고 간 도시의 잔해 속에서, 이안은 낡은 기록 보관소의 깊은 곳으로 더 파고들었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먼지 쌓인 선반들 사이로 고대 문명이라도 되는 양 뒤섞인 디지털 저장 장치들과 종이 문서들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도착한 이곳은, 과거를 찾아 헤매는 그에게 언제나 혼란스러운 영혼의 안식처이자 동시에 가혹한 심문실이었다.
이안의 손에 들린 것은 손바닥만 한 데이터 칩이었다. 겉모습은 평범했으나, 내부에 담긴 정보를 해독하려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손을 타고 심장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어제, 이 칩을 해독하려다 실패하자마자 그의 시간 장치는 제멋대로 튀어 올라 엉뚱한 시간대로 그를 던져버렸고, 돌아오는 길에 간신히 붙잡은 한 가닥 실마리가 바로 이 낡은 보관소의 좌표였다.
“다시… 여기인가.”
이안은 중얼거렸다. 보관소 한구석에 간신히 작동하는 낡은 재생 장치를 찾아내 칩을 삽입했다. 지지직거리는 소음 끝에, 스크린에 희미한 영상과 함께 왜곡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릿한 영상 속에는 낯선 얼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문득, 멈춘 화면 속에서 이안은 자신의 과거를 직면했다. 한 여인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커다란 눈, 그리고 너무나 익숙해서 오히려 낯선 미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안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아마도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음성은 여전히 파열되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표정에서 읽히는 절박함과 애틋함은 이안의 가슴을 저몄다. 잊어버린 시간 속 어딘가에서, 그가 사랑했던 사람일까? 아니면 그가 지켜주려 했던 존재였을까? 기억의 파편들이 거친 파도처럼 머릿속을 때렸다. 아득한 슬픔이 목을 죄어왔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감정, 사랑, 약속, 그리고 자신이란 존재의 근원이었다.
그때, 재생 장치에서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이 울렸다. 칩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과부하가 장치를 망가뜨리려 하고 있었다. 이안은 다급히 칩을 빼냈다. 스크린은 검은 화면으로 변했고, 희미했던 여인의 미소는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의 손에 남은 칩은 더욱 뜨거워져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들이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처럼.
“멈춰서는 안 돼… 여기서 멈추면 안 돼….”
이안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단편적인 감각만으로도 그는 이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푸는 열쇠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칩이 그를 위험한 미지로 이끌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도 함께였다. 칩의 손상이 너무 심해, 이것을 완전히 해독하려면 현재 시대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그는 더 먼 미래로, 혹은 더 깊은 과거로 떠나야만 했다.
바로 그때, 보관소 입구에서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돌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다. 이안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희미한 불빛 너머로, 낯익은 실루엣이 나타났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망토, 그리고 그 아래로 언뜻 보이는 금속성의 팔. 그는 시간선의 균형을 감시하는 자들, 즉 ‘감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집요한, ‘코드네임 제로’였다.
이안의 시간 이동은 언제나 시간선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고, 그 파동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들이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것은, 그가 이제껏 발각된 것 중 가장 큰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했다. 제로는 이안이 손에 쥔 데이터 칩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그들이 이 칩을 노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로의 차가운 목소리가 고요한 보관소를 갈랐다.
“기억을 잃은 방랑자여, 너의 시간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 과거를 헤집고 시간선을 오염시킬 순 없어. 우리가 너를 제자리에 돌려놓아 주지.”
‘제자리에 돌려놓아 준다’는 말은 곧 그의 존재를 소멸시키겠다는 위협이었다. 이안은 숨을 죽였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울렸고, 손에 쥔 데이터 칩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뜨겁게 고동쳤다. 이 칩에 담긴 과거, 그리고 그 속의 여인… 그것만이 이안을 움직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는 달아날 곳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재생 장치 옆, 부서진 벽 뒤편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또 다른 시간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 균열은 너무 불안정해 보였다. 잘못 뛰어들었다간 영원히 시간의 미아로 남을 수도 있었다.
제로의 발소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안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희미한 여인의 미소를 품고 죽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한 균열 속으로 뛰어들어 또 한 번의 망각과 위험에 몸을 던질 것인가. 그는 망설임 없이 균열을 향해 몸을 던졌다. 기억의 조각들이 칩 속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그는 다시 한번 시간의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기다려, 내가… 내가 너를 찾아낼게…”
이안의 흩어지는 외침만이 텅 빈 보관소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제로는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시간의 잔상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