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294화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손바닥에 선명했다. 시우는 그것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작고 투박한 육면체. 그의 기억을 조각내어 우주 미아로 만들었던 그 시간 여행선의 파편 중 하나였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조각이, 유이와 함께 밤새워 연구한 끝에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그 기능은 기쁨보다 더 깊은 슬픔을 드리웠다.

“이걸… 활성화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야.” 시우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다 절규에 가까웠다. 창밖으로는 새벽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희미한 빛이 방안을 채웠다.

유이는 시우의 옆에 앉아 그의 떨리는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흔들림 없었다. “모든 기억이… 전부 다요?”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누구였는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함께한 이 모든 시간들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수도 있어.”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그들의 숨소리만이 아득하게 들렸다. 그들은 수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처음 시우가 기억 없이 헤매던 순간부터,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기까지. 이름도, 과거도 없는 남자와, 그에게 모든 것을 걸었던 여자. 그들의 서사는 이 세계의 기록에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것이 한순간의 선택으로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듣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을 되찾을 수 있잖아요.” 유이의 목소리는 억지로 평온한 척했지만, 미세한 떨림이 시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시우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유이를 바라보았다. “내 삶? 내 삶이 어디 있어? 나의 삶은… 당신과 함께 여기에서 시작되었어. 당신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그는 기억을 잃은 채 이 시공간에 떨어졌다. 마치 백지처럼 새로운 존재로 시작했지만, 유이와의 만남은 그 백지에 가장 찬란한 색깔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지우고, 텅 빈 캔버스 위에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 과연 ‘자신’을 되찾는 일일까?

“이 파편이 나에게 마지막 선택권을 주었어.” 시우는 육면체를 더욱 꽉 쥐었다. “이걸 활성화하면, 모든 것이 리셋되거나, 아니면… 내가 과거의 나와 완벽하게 동기화될 거야.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의 내 기억은… 흔적조차 남지 않을 수도 있어.”

유이는 시우의 손을 더 깊이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당신은… 당신의 원래 삶으로 돌아가야 해요. 당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당신이 기억해야 할 소중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당신을 잃어야 한다면… 나는 이대로 괜찮아. 기억 없는 시간 여행자, 그게 지금의 나야. 당신과 함께라면… 영원히 이대로 살아갈 수 있어.”

그의 진심에 유이의 눈가에도 물기가 번졌다. 그녀는 시우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요. 당신은 모든 것을 알 자격이 있어요. 당신은 그저 길을 잃었을 뿐이고, 이제 그 길을 찾을 기회가 온 거예요.”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가…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주었듯이, 당신의 과거 또한 당신에게 소중한 모든 것이었을 거예요. 그걸 외면하지 마요.”

시우의 눈앞에 흐릿한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낯선 얼굴, 익숙한 슬픔. 그의 가슴 한편에 늘 자리 잡았던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순간적으로 선명해졌다.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유이의 말에, 그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것은 현재의 유이에 대한 사랑과는 또 다른, 깊고 아린 감정이었다.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시우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유이는 미소 지었다. 눈물로 얼룩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한 미소였다. “그럼… 당신을 기다릴게요.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든,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없더라도… 나는 당신이 이곳에 남긴 흔적들을 기억하며 살 거예요. 그리고 다시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그녀의 말이 시우의 마음속 깊은 곳에 울려 퍼졌다. 그는 자신을 잡고 있는 유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을 놓아야만,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손을 놓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자신을 잃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이내 강철 같은 결의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육면체를 유이의 손에 올려놓았다. “활성화 버튼이… 어디 있지?”

유이는 눈물을 삼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육면체의 가장자리에 숨겨진 작은 돌기를 눌렀다. 희미한 푸른빛이 육면체를 감싸며 방안을 흔들었다. 미세한 진동이 시우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미지와 소리, 감각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 기억과 망각의 경계가 무너지며 혼돈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유이…” 시우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이미 아득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었고, 몸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이는 시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괜찮아요… 내가 여기 있어요. 돌아와요, 시우… 반드시…” 그녀의 마지막 말이 흐릿한 빛 속으로 녹아들었다. 시우의 눈은 감겼고, 그가 쥐고 있던 육면체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폭발하듯 흩어졌다. 방안을 가득 채웠던 푸른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유이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만이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시우는, 그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