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우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사무실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창밖으로는 해 질 녘의 보랏빛 노을이 도시의 빌딩 숲을 물들이고 있었다. 또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그의 첫사랑, 한서연을 찾는 여정 역시,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하루를 보냈다.
그는 탐정이 된 이후 수많은 실종 사건과 미궁에 빠진 단서를 쫓아왔다. 그러나 그 어떤 사건도 서연을 찾는 이 지독한 여정만큼 그를 지치게 하지는 못했다. 간혹, 아주 간혹, 스치듯 서연의 흔적처럼 보이는 단서를 발견하면, 그의 심장은 멈출 듯 격렬하게 뛰다가 이내 다시 차갑게 식어버리곤 했다. 희망은 언제나 찰나의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라졌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오후, 경찰청 자료실에서 겨우 찾아낸 낡은 사건 파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 년 전, 그가 아직 햇병아리 형사였을 시절에 담당했던 자잘한 절도 사건들. 서연의 실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녀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동네의 주변 사건들을 뒤지는 무의미한 시도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파일을 하나씩 넘기기 시작했다. 바랜 글씨, 흐릿한 사진들, 용의자들의 이름… 아무리 들여다봐도 서연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얇게 찢어진 서류들 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툭 떨어졌다. 상자는 짙은 갈색 나무로 만들어졌고, 표면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덩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낡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은 물건이었다.
“이건…?”
태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 물건은 십 년 전, 그가 담당했던 한 전당포 절도 사건의 증거품 목록에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에는 흔한 도난품 중 하나였을 뿐, 특별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사건이 해결된 후, 압수된 다른 잡동사니들과 함께 창고 어딘가로 치워졌을 터였다. 그런데 왜 지금, 서연의 마지막 흔적을 뒤지던 이 파일 속에서 나타났을까?
태우의 손가락이 상자의 표면을 천천히 쓸었다. 매끄러운 나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그때, 그는 상자의 한쪽 면에 아주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자세히 봐야 겨우 보이는 정도의 흐릿한 각인이었다. 태우는 상자를 창가의 노을빛에 비춰 보았다. 길게 드리워진 햇살이 각인된 글자들을 신비롭게 비춰냈다.
잃어버린 멜로디
그것은 시 한 구절이었다. 서연이 가장 좋아했던 시집에 수록된, 그녀가 가장 아꼈던 구절이었다. 그녀는 종종 이 구절을 읊조리며 미소 짓곤 했다. 태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잊히지 않는 첫사랑의 기억이 격류처럼 그의 온몸을 덮쳤다. 차갑게 식었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우연이었다. 아니, 우연이 아니었다. 직감이 그에게 속삭였다.
“서연아…”
그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낡은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상자 안쪽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태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상자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무 안쪽에서 비어있지 않은 듯한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어딘가 숨겨진 공간이 분명했다.
그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숨겨진 버튼이나 장치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상자 뚜껑 안쪽에 아주 미세한 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톱으로 살짝 눌러보니,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바닥이 살짝 들어 올려졌다. 그 아래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사진 한 장과 얇게 접힌 종이 조각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사진은 흑백이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은 십수 년 전, 태우와 서연이 함께 자주 찾았던 오래된 찻집의 내부였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서연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시간의 흔적 속에서도 여전히 눈부셨다. 태우의 눈가가 시큰거렸다. 사진 속 서연의 등 뒤로는 낡은 벽걸이 시계가 보였다. 바늘은 오후 3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그 시간에 만나곤 했다.
태우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 조각을 펼쳤다. 서연의 필적이었다. 단정한 글씨체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태우에게.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가 당신에게 이 상자를 주려던 날은 오지 못했겠지요.
내게 마지막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단 한 번만 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모든 것은 그날, 그곳에서 다시 시작될 거예요.
기억해 줘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곳, 그리고 우리의 잃어버린 멜로디를.
서연이가.
종이 조각은 거기서 끝이었다. 단서는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태우의 심장은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날, 그곳.’ 서연이 사라진 날, 그들이 함께 했던 마지막 장소.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멜로디가 흘러나오던 곳. 태우는 그 장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찻집이었다. 사진 속 그 찻집.
태우는 곧바로 일어섰다. 몸의 피로 따위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십 년의 세월이 그를 짓눌러왔지만, 이 작은 상자 하나가 그의 모든 감각을 깨웠다. 이것은 단순한 단서가 아니었다. 서연이 그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이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메시지가 언제 남겨진 것일까? 서연이 실종되기 직전, 혹은 그 이후? ‘내게 마지막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이라는 문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그는 서둘러 코트를 집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낡은 찻집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을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잃어버린 멜로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찻집에서 흘러나오던 음악? 아니면 서연만이 알고 있는 어떤 비밀의 암호?
밤의 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며, 강태우는 마치 처음 탐정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던 날처럼 뜨거운 심장을 안고 달려갔다. 십 년간 잊힌 듯 멈춰 있던 시계가, 이제 다시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잃어버린 멜로디의 끝에서, 과연 그는 서연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나무 상자가, 마치 그들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듯 희미한 노을빛 아래 빛나고 있었다. 그의 오랜 방랑이 이제야 진정한 종착역을 향해 방향을 잡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재회일지, 혹은 또 다른 미스터리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