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92화

저무는 강가의 속삭임

창밖으로 드리운 어둠은 언제나처럼 침묵으로 가득했다. 낮의 소란스러운 잔해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오직 차가운 공기만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뺨을 스쳤다. 지영은 작은 나무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응시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잎사귀들은 생생한 초록을 잃고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덧없이 땅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지영의 마음 한구석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창틀에 톡, 하는 가벼운 소리가 들렸다. 지영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두 눈, 그리고 윤기 흐르는 검은 털이 있었다. 길고양이, 별이. 언제나처럼 조용히 나타나 제 존재를 알리는 법이 없었다. 마치 지영의 마음속 외로운 그림자를 읽기라도 한 듯, 그저 말없이 앉아 지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별이야, 왔어?” 지영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별이는 작게 ‘야옹’ 하고 대답하며 창턱으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지영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전히 그 깊은 눈빛으로 지영을 주시했다.

“밤이 길어지고, 나뭇잎들은 다 떨어지고…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흐른다, 그렇지?” 지영은 손가락으로 차가운 유리창을 더듬었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 같아서, 붙잡고 싶어질 때가 있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별이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나지막하고도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영아, 너는 흐르는 강물도 붙잡으려 하는구나. 강물은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영은 별이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붙잡을 수 없으니까 더 아쉬운 걸지도 몰라.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흐르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일 뿐이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 물방울 하나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니.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오고, 또다시 강이 되어 흐르듯. 모든 것은 순환하는 법이다.”

별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설득력 있었다. 지영은 그 목소리 속에서 알 수 없는 위로를 느꼈다.

“하지만 사라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져버린 꽃잎처럼, 흘러간 시간처럼…”

“꽃잎은 떨어져 흙이 되고, 그 흙은 다시 새싹을 틔운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시간 속에 네가 얻었던 경험과 감정들은 너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지 않아. 오히려 너를 더 단단하고 풍요롭게 만들지.” 별이는 가만히 지영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가 아쉬워하는 것은 사라진 순간들이 아니라,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었던 너의 마음일 뿐이다.”

지영은 별이의 말에 가슴이 저릿해졌다. 정말 그랬다. 그녀가 아쉬워했던 것은 순간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에 느꼈던 따스함, 행복, 그리고 함께 했던 기억들이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 추억들이 희미해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럼, 너와 내가 이렇게 마주 보는 이 순간도…” 지영은 말끝을 흐렸다.

“이 순간은 그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우리는 함께 흐르는 강물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돌멩이와 같다. 강물은 변해도, 돌멩이는 그 자리에 있어 서로를 기억한다.”

지영은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밖은 여전히 차가운 밤이었지만, 별이의 존재와 그 말들이 마음속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영원히 남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별이는 늘 이렇게 일깨워주곤 했다. 이 작고 검은 그림자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지혜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은 조용히 손을 뻗어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별이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아주 작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물은 계속 흘러갈 것이고, 계절은 또 변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창가에 함께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지영과 별이의 이야기는, 그 어떤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었다. 지영은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