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소음은 희미해지고, 그 빈자리를 별들이 채우는 듯했다. 지영은 창밖을 응시했다. 작업실은 고요했고, 책상 위에는 마감 기한이 임박한 디자인 시안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쌓여가는 피로만큼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먹먹함이 지영을 짓누르는 밤이었다. 그런 밤의 유일한 위안은 늘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어 주는 라디오였다.
지영은 손을 뻗어 낡은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투박한 소음 속에서 주파수를 맞추자, 익숙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우 DJ의 목소리였다. 수많은 밤을 외로움과 싸우는 이들의 곁을 지켜온, 마치 밤하늘의 길잡이 별처럼 포근한 음성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정우입니다. 이 시간, 잠 못 이루는 당신의 곁에 작은 위로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유독 별이 쏟아질 것만 같은 밤이네요. 이런 밤에는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문득 떠오르곤 하죠. 마치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보물상자가 수면 위로 떠오르듯이 말입니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그런 보물을 찾아낸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지영은 컵에 남은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정우 DJ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부드럽게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사연이 시작되었다.
잃어버린 별 조각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중반의 회사원, 김민규라고 합니다. 최근 저희 동네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제가 어릴 적 자주 놀던 작은 공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그곳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싶어 얼마 전 다녀왔습니다. 오랜 세월 버려지다시피 했던 곳이라 나무들은 무성하게 자랐고, 작은 오솔길은 거의 희미해져 있었죠. 그런데 그곳을 거닐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땅에 반쯤 파묻혀 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지영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돌멩이라니.
“크지 않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돌이었는데, 겉면은 매끄럽고 둥글었지만, 햇빛을 받으니 어딘가 모르게 영롱한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마치 밤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별 조각처럼요. 그 돌을 보는 순간, 잊고 지냈던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저와 단짝이었던 옆집 여자아이, 수진이와 함께였습니다. 그 공원 한가운데,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묻었었죠.”
지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플라타너스 나무. 돌멩이. 별 조각.
“그때의 우리는 작은 비밀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철없는 아이들이었죠. 우리는 저마다 마음에 담은 소중한 소원을 적은 쪽지와 함께, 밤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믿었던 그 ‘별 조각’을 깊이 묻었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죠. 어른이 되어서 각자의 꿈을 이루게 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그 돌을 찾아내자고요. 누가 먼저 찾든, 돌을 찾아낸 사람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자고. 그리고 수진이는 그 약속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한 채,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죠. 돌멩이에 대한 기억도, 그 약속도, 세월 속에 잊혀 간 줄 알았습니다.”
지영은 굳게 닫았던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했다.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깨진 거울 조각들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심장은 북을 치듯 격렬하게 울렸다. 민하. 그 이름 석 자가 십수 년 만에 그녀의 의식 속으로 떠올랐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단짝이었던 민하와 지영은 늘 함께였다. 학교가 끝나면 함께 동네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서로의 집 창문 너머로 손전등 신호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밤, 유난히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던 여름밤이었다. 두 아이는 몰래 집을 나와 동네 공원의 낡은 미끄럼틀 옆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영아, 저 별들 봐.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민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민하는 언제나 꿈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 그때 지영은 우연히 미끄럼틀 아래 흙바닥에서 작고 반짝이는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비가 온 뒤라 흙탕물이 마르지 않은 곳에, 유독 그 돌멩이만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거 봐, 민하야! 별 조각이야!”
지영의 외침에 민하는 눈을 반짝였다. 두 아이는 그 돌이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조각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별 조각을 공원 한쪽에 있던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에 묻었다. 정확히는 떡갈나무 바로 옆, 민하가 매일 보물처럼 아끼던 장난감 동물 인형 하나와 함께였다. 그때의 약속은 어쩌면 김민규 씨의 사연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어른이 되어 꿈을 이루면, 그 별 조각을 다시 찾아내자고.
그다음 해, 민하는 가족과 함께 갑자기 이사를 갔다. 어떤 말도, 작별 인사도 없이. 지영은 한동안 그 별 조각과 떡갈나무 아래를 맴돌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 학년에 적응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그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리고 오늘 밤, 이 라디오를 통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 별 조각을 다시 손에 쥐었을 때, 마치 어린 시절의 저와 수진이가 제 손을 잡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잊고 지냈던 순수함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한꺼번에 밀려왔죠. 지금 저는 그때의 우리가 꿈꾸던 어른이 되었을까요? 그리고 수진이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요? 그 별 조각을 보고 수진이도 저처럼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아마 그 별 조각은 제게 잃어버린 꿈과 용기를 다시 찾아준 것 같습니다. 이 밤, 저처럼 잊고 지냈던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시길 바라며 사연 마칩니다.”
사연은 끝났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지영은 눈을 감은 채,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그 별 조각은 단지 돌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약속이었고, 헤어진 친구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으며, 어쩌면 잃어버렸던 그녀 자신의 일부였다.
정우 DJ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김민규님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잊고 지냈던 소중한 기억을 되찾으신 것 같아 저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별 조각’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너무 깊이 묻어두어 그 존재조차 잊고 지내는 보물 같은 기억들이요. 오늘 밤, 잠시 숨을 고르고 당신의 마음속 별 조각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분명 당신에게 필요한 따뜻한 빛을 비춰줄 것입니다.”
지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의 밤하늘은 여전히 수많은 별들로 가득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쌓여있던 먹먹함이 마치 물결에 쓸려 내려가는 모래성처럼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피곤함도, 막연한 허전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가슴속에는 따뜻한 빛이 스며들었다. 내일, 아니, 해가 뜨는 대로. 그녀는 오래전 이사 온 지금의 집에서 다시 한번 그 옛날 동네의 떡갈나무 아래로 찾아가 볼 작정이었다. 별 조각을 다시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곳에 남아 있을지 모를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리고 민하와의 순수한 약속을 다시 한번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다음 곡으로 평화로운 멜로디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지영은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수많은 별들이 그녀의 눈빛 속에서 반짝이는 듯했다. 잃어버린 별 조각이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