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972화

무한의 시간 속에 갇힌 듯, 시아는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홀로 깨어났다. 어둠이 옅게 드리운 작은 방은 간이 거처라기엔 지나치게 정갈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미로 속을 헤매는 어린아이 같았다. 창밖으로는 이름 모를 미래 도시의 첨탑들이 뿌연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솟아 있었다. 그녀는 그 풍경 속에서 어떤 기시감도, 어떤 익숙함도 찾아낼 수 없었다.

기억. 영원히 사라져버린 과거의 파편들. 그녀의 존재는 온전히 현재에만 머물고 있었다. 자신을 시간 여행자라 소개했던 재하의 말도, 그녀가 특정 시대의 유물에 반응한다는 사실도, 그녀가 가진 이 알 수 없는 능력도, 모두가 타인의 증언과 객관적인 현상으로만 존재할 뿐, 그녀의 내면에서는 그 어떤 울림도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 한쪽의 낡은 나무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재하가 혹시 모를 기억의 단서라며 그녀에게 맡긴 것들이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 몇 장,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고문서 조각, 그리고… 작은 나무 조각상이 있었다. 손바닥에 겨우 올라올 만한 크기의 새 조각상. 정교하게 다듬어진 날개와 깃털, 그리고 막 날아오르려는 듯 위로 향한 부리까지,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나무 조각상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매끄러운 감촉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이유 없이 울렁거렸다. 손안의 조각상이 희미한 빛을 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조각상을 쥔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어둠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듯한 작은 불씨, 그런 미미한 변화가 그녀 안에서 시작되었다.

무언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주 희미하고 먼, 오래된 멜로디. 그것은 바람 소리 같기도, 누군가의 낮은 콧노래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정확한 단어는 없었지만, 그 음색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기억하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너는, 자유롭게 날아갈 거야…”

그 목소리가 희미해지는 순간, 시아의 눈앞에 선명한 이미지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햇살이 쏟아지는 넓은 들판. 푸른 하늘 아래 흔들리는 키 작은 풀잎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보다 조금 더 큰 한 남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역광에 가려진 실루엣뿐이었지만, 그가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방금 그녀가 들고 있던 것과 똑같은 나무 조각상이 들려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하늘로 조각상을 던지자, 진짜 새가 되어 날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강렬한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시아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손에 쥔 나무 조각상이 땀으로 축축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그저 압도적인 혼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의 파고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겨우 한 조각의 퍼즐을 찾았지만, 그것이 어떤 그림의 일부인지 알 수 없어 더욱 고통스러웠다.

“시아?”

조용한 새벽을 가르는 인기척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재하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보이는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재하는 순식간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길은 늘 그렇듯 침착하고 따뜻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괜찮아? 또, 또 그 기억의 파편이….”

시아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 조각상을 그에게 내밀었다.
“재하… 이게 뭐죠? 이 새… 이 남자… 들판… 그리고 이 목소리…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재하는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입술, 깊어지는 미간의 주름.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조각상을 다시 시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야, 시아. 네가 처음 시간의 문을 넘기 전의… 아주 소중했던 기억의 일부일 거야.”

“소중했다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프죠? 왜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죠?” 시아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섞여 있었다. “그 남자는 누구였어요? 이 목소리는… 제가 알아요. 분명히 알아요!”

재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나는… 너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야, 시아.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면… 넌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게다가… 너의 기억 속에는, 네가 알면 안 되는 위험한 진실도 섞여 있어.”

위험한 진실. 시아는 재하의 말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감지했다. 단순히 그녀를 걱정하는 것을 넘어선, 어떤 두려움. 그녀의 눈은 다시 나무 조각상으로 향했다. 조용히 날개를 펼치려는 듯한 새의 형상. 그녀는 문득, 조각상 아랫부분에 아주 작게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만졌을 텐데, 이제야 눈에 들어온 미세한 흔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작은 삼각 기호와 그 안에 새겨진 복잡한 선들. 익숙한 듯 낯선 문양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문양을 더듬자, 재하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가는 당황스러움, 그리고 씁쓸함. 시아는 직감했다. 재하가 감추고 있는 것은 그녀의 안녕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자신 혹은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나무 조각상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어떤 신호였고, 어떤 약속의 증표였을 것이다.

“이 문양… 이건 뭐죠?” 시아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것도 제 기억의 일부인가요? 아니면… 재하, 당신이 숨기고 있는 그 ‘위험한 진실’과 관련된 것인가요?”

재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방 전체를 덮는 듯했다.
“시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 문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 너는 더 이상 평범한 시간을 살 수 없을 거야. 네 존재 자체가… 거대한 흐름을 뒤흔들게 될 테니.”

시아는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비록 단편적인 조각이었지만, 그녀는 그 기억의 감각을 붙잡았다. 그 따뜻한 목소리,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새, 그리고 들판에 서 있던 실루엣의 남자.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는 더 이상 과거를 두려워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누구였는지, 왜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당신이 숨기고 있는 ‘위험한 진실’이 무엇인지… 저는 반드시 알아낼 거예요.”

새벽의 푸른빛이 창을 넘어 들어와 나무 조각상에 닿았다. 희미한 빛이 조각상에 새겨진 문양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었다. 재하는 시아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지만 기억의 끝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우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든 거야.”

그의 말과 함께, 미래 도시의 첨탑 너머에서 붉은 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하루, 그리고 972번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시아는 손안의 조각상을 꽉 쥐었다. 이제 그녀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는 단순한 시간 여행자가 아니었다. 스스로의 진실을 찾아 거대한 운명에 맞서려는 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