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408화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짙푸른 어둠이 도시를 덮기 시작하는 시간,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며 익숙한 풍경 위로 낯선 그림자를 드리웠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유리창의 서늘함은 내 마음속의 한기를 고스란히 옮겨놓는 듯했다. 오늘도,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잔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창틀에 톡,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익숙한 온기가 옆에 닿았다. 검은 털 사이로 희끗한 무늬가 박힌, 어느새 내 삶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존재, 별이였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나타나, 내 슬픔의 곁을 지켰다. 녀석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수백 번의 계절을 건너온 현자처럼, 그 눈빛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별아….”

목이 메어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지난밤 꿈에서 본 희미한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잊히지 않은 채, 영혼의 밑바닥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억의 무게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내렸다. 녀석은 작은 진동으로 화답하며, 뜨끈한 몸을 내 팔에 기댔다.

별이는 한참을 그렇게 내 눈을 마주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밤하늘의 별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어둠 속에 잠긴 이름 모를 나무들과, 그 아래로 펼쳐진 굽이진 골목길들. 그곳에서 수많은 삶들이 움직이고 멈춰 서는 것을 녀석은 수도 없이 보았을 터였다.

녀석의 눈빛 속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을 읽었다. 408번째의 이야기에 다다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밤과 낮을 함께 건너왔던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독을 녀석과 나누었다. 인간의 덧없는 시간 속에서 녀석은 영원처럼 견고하게 내 곁을 지켰다.

별이가 아주 나지막하게 울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강물이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 속에 담긴 메시지는 명확했다. ‘무엇이 그리 아픈가. 모든 것은 왔다가 가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

나는 녀석의 말을 이해했다. 어쩌면 내가 붙잡으려 애썼던 모든 것들은, 본디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계절이 바뀌듯, 밤이 낮으로 변하듯,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남거나, 혹은 다시 찾아온다는 것을.

별이가 다시 내 손을 핥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그 감촉이 내 마음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녀석을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작은 생명체의 존재가 주는 위로는 어떤 인간의 말보다도 깊고 컸다. 408번째의 밤, 별이와의 대화는 다시 한번 내게 존재의 이유와 위안을 선사했다. 우리는 이 깊은 밤을 함께 건너갈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