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433화

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빗방울은 유리창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굵은 모래알처럼 거칠게 부딪혔다. 방 안은 그 소리 때문에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낡은 소파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아니, 어쩌면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래왔는지도 모르겠다. 어깨 위로 얹힌 이름 모를 짐들은 이제 내 영혼을 짓누르는 바위덩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묵직한 온기가 내 허벅지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익숙한 무게감. 눈을 뜨자, 먹먹한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달이였다. 언제나처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나타난, 길고양이 달이.

“달아…”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오늘은 정말… 모든 게 싫다.”

달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내 발치에 기대었다. 부드러운 털이 피부에 닿는 감촉이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는 듯했다. 녀석의 체온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내 마음을 천천히 데우는 것 같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 어쩌면 선택 자체가 없었을지도 몰라.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달이는 여전히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녀석은 언제나 그랬다. 말없이 듣고, 말없이 위로하는 것이 녀석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달이의 금빛 눈동자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눈빛은 마치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세월을 견뎌온 모든 기억을 읽어내려는 듯했다.

잠시 후, 달이의 목에서 낮고 부드러운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내, 늘 그랬듯 내 머릿속으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고 단호한 울림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이미 네가 그 길을 걸어왔다는 뜻이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 후회하라는 말이야?”

달이는 고개를 살짝 들고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거울 같았다. 녀석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처럼 잔잔하면서도, 거대한 바위를 움직일 만한 힘을 담고 있었다.

“아니. 후회는 지나간 발자국 위에 다시 발을 찍는 것과 같아. 하지만 네가 걸어온 길은… 다른 길로 이어진다. 모든 발자국은 다음 걸음의 디딤돌이 되지. 설령 그 길이 가시밭길이었을지라도, 너는 그 위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내 가슴 속에서 차가운 응어리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배웠는가.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상처와 실망, 그리고 좌절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진정 아무것도 없을까? 너는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맞았고, 얼마나 많은 햇살을 보았으며, 얼마나 많은 그림자를 떨쳐냈지? 너는 약해지지 않았어. 다만, 모든 것이 너무 무거워진 것뿐이야. 그리고 그 무게를 덜어내는 것은, 네 과거가 아니라… 네가 이제부터 만들어갈 미래에 달려있어.”

달이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서재의 낡은 책갈피처럼, 내가 잊고 있던 페이지를 다시 펼쳐주는 듯했다. 미래. 나는 언제부턴가 미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빗소리는 여전히 거셌지만, 더 이상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소리가 내 안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씻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달이는 다시 내 허벅지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녀석의 존재감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달이의 부드러운 등을 쓸어내렸다. 작은 심장이 녀석의 몸속에서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그래, 나는 아직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달이도 여기에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단지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내 안에서는 아주 작은 빛 하나가 깜빡이는 듯했다. 그것은 희망이라기보다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의 씨앗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을 싹 틔울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달이는 말하고 있었다. 다음 걸음은… 어떻게든 내딛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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