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의 아이
지은은 낡은 다락방의 희미한 전등 아래, 먼지 쌓인 나무 상자들 사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이제는 익숙한 무게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이 작은 책 안에 담긴 지난 수백 개의 페이지를 읽어오며, 지은은 할머니의 삶이 단순히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음을, 때로는 잔혹하고 무거운 진실로 가득했음을 깨달았다.
며칠 전, 가족들 사이에서 수십 년간 금기시되었던 ‘그날의 일’에 대한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을 때, 지은은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쉬쉬하며 덮으려 했던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기어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언제나처럼, 할머니의 일기장이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늦은 밤의 정적을 갈랐다. 드디어, 할머니의 흐릿한 필체가 유난히도 격정적으로 쓰인 한 페이지에 다다랐다. 날짜는 지은이 어렴풋이 들었던 ‘그날’과 일치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아팠다.
“…그 아이. 내 심장으로 낳았으나, 세상의 잣대로는 차마 품을 수 없었던 아이. 그 작은 손을 놓아주던 그 순간, 내 모든 봄은 시들어버렸다.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미소를 지어야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가야 했다. 밤마다 울부짖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 아이의 고운 눈망울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부디, 억겁의 세월을 건너 내 죄를 용서치 말아라. 하지만, 단 한 순간만이라도 따뜻했기를. 작은 손, 작은 발, 작고 연약한 나의 아가. 다시는 볼 수 없었던, 내 잃어버린 계절의 아이…”
지은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질 뻔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 아이.’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녀의 할머니는, 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를 놓아주었다는 말이었다. 가족 누구도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너무나도 잔인한 비밀이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든 것이 미궁이었다.
다락방의 차가운 공기가 지은의 볼을 스쳤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슬픔, 충격,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뒤섞였다. 평생을 강인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살아왔던 할머니의 이면에, 이토록 사무치는 고통과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의 모든 미소 뒤에는 이 아이를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있었을까.
지은은 일기장을 다시 그러쥐었다. 할머니의 필체가 떨리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이제야 비로소, 가족들의 침묵, 할머니의 유독 깊었던 눈빛, 그리고 자신에게도 모호하게 느껴졌던 어떤 공허함의 근원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비밀은 단순히 할머니만의 것이 아니었다. 대를 이어 흐르는 가족의 깊은 강물 속, 잊혀진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모두의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창밖에서는 새벽 별들이 차갑게 빛났다. 지은은 할머니의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이제 그녀는 이 잃어버린 계절의 아이를 찾아야 했다. 아니, 적어도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머니가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모든 진실을 밝혀내야만 했다. 그것은 할머니의 짐을 함께 나누는 일이자, 억압된 가족의 역사를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지은은 직감했다. 길고 긴 여정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제 막, 그 첫걸음을 뗀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