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게. 이안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안개 낀 풍경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비명 소리, 누군가의 절박한 속삭임,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섬광. 기억을 잃은 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혹은 단 하루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개념마저 그에게는 무의미한 흐릿한 강물일 뿐이었다.
그는 지금, 폐허가 된 도시의 가장 높은 첨탑 잔해 위에 서 있었다. 바람이 찢어진 도시의 그림자 사이로 흐느끼듯 불어왔다. 멀리 아래로는 거대한 균열이 지평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세상이 찢겨나간 상처, 그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존재했던 흉터. 이곳에 온 이유도,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멈출 수 없는 충동처럼 이곳으로 이끌렸을 뿐이었다.
손에 들린 것은 낡은 회중시계였다. 흠집 많고 빛바랜 황동 케이스. 태엽 감는 꼭지는 부러져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초침은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안은 그 시계를 품에 꼭 안았다.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이 시계 안에 봉인되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한 갈망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이안.”
낮게 깔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것은 언제나처럼 신비로운 기운을 풍기는 지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고요했지만, 눈빛에는 늘 지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이안의 유일한 안내자이자, 동시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아직도, 그 시계인가요?” 지아는 시선을 시계에 고정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볼 때마다… 뭔가가 느껴져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림자 같은 것들이.”
“그 그림자들을 쫓으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아는 품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손상된 종이에는 희미한 글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안은 그 문양들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늘 꿈속에서 보던, 기이한 상형문자들이었다. 잃어버린 자신의 언어 같았다.
“이건…?” 이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시간의 서고에 있던 기록입니다. 당신의 여정, 그리고 당신이 잊어버린 모든 것의 단서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매우.”
지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안에는 경고와 함께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양피지 속 그림은 거대한 탑을 가리키고 있었다. 끝없이 위로 솟아오른 듯한 그 탑은, 이안이 아까 꿈에서 보았던 붉은 섬광이 번뜩이던 곳과 겹쳐 보였다.
“어디죠, 이곳은?” 이안은 손을 뻗어 양피지의 그림을 더듬었다.
“기억의 심장부입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바로 그 장소.”
지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고통이 스쳤다. 마치 날 선 칼이 뇌를 찢는 듯한 아픔이었다. 그의 시야가 일그러지며,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이 일순간 거대한 도서관으로 변했다. 수많은 책들이 끝없이 꽂혀 있는 거대한 공간, 그리고 그 중앙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신이었다.
젊고 활기 넘치며, 눈빛에는 별을 품은 듯한 빛이 가득했던 자신. 그리고 그 자신은 손을 뻗어 한 권의 책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소름 끼치는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이안은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현실로 돌아오자, 차가운 바람만이 그의 땀으로 젖은 이마를 식혔다. 지아는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당신의 기억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요. 저 그림자, 저 그림자가 제 모든 것을 앗아갔을 겁니다. 저는… 저는 알아내야 해요.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림 속 탑의 실루엣이 그의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기억의 심장부. 모든 고통의 시작점이자, 모든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 그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쥐인 회중시계는 미동도 없었지만,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 순간, 첨탑 잔해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이안의 발밑에서 돌연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거대한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첨탑의 조각들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안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벌어지는 심연이었다. 그리고 그 심연 속에서, 방금 전 꿈에서 보았던 검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부르는 듯했다. 그의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이안은 지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당혹감과 공포가 스쳤다.
“이안, 안 돼! 아직 때가…!”
지아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안은 거대한 균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잃어버린 기억의 심장부를 향한, 위험천만한 낙하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