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준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진열장 위에 놓인 낡은 탁상시계를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시계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오전 11시 37분. 세상의 모든 시간이 흐르던 말던, 이곳 ‘시간이 멈춘 골동품 가게’에서는 그저 하나의 풍경일 뿐이었다. 오래된 나무 탁자 위로 먼지가 소리 없이 내려앉는 그 순간까지도, 가게 안의 공기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지해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맑게 울리며 윤세아가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미묘한 슬픔과 기대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세아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늘 어떤 특정한 것을 찾아 헤매는 듯했다. 서준은 그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세아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매는 이들 중 하나였다.
“오늘도 별다른 건 없네요,” 세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속에는 체념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급할 것 없습니다.” 서준은 그리 말하며 찻잔을 내밀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나는 녹차였다.
세아는 녹차를 받아 들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가게 안쪽의 가장 어두운 구석,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은 상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주인도 알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을 견딘 물건들이 잠들어 있었다. 한서준은 세아가 지난 몇 년간 이곳을 오가며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동생과의 마지막 추억이 담긴 물건이었다. 특히, 동생이 늘 지니고 다니던 작고 낡은 회중시계. 평범한 시계였지만, 세아에게는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 귀한 것이었다.
세아가 탁자 위 빈티지 앨범을 무심코 넘기다,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앨범 사이에서 툭 하고 떨어진 것은, 낡고 빛바랜 천 조각에 싸인 작은 회중시계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세아의 귓가에 울렸다. 서준 역시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는 그 시계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이곳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는 듯이,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것이었다.
세아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걷어냈다. 동생의 것이 분명했다. 어릴 적 동생이 늘 자랑스레 보여주던, 앞면에 작은 흠집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바로 그 시계였다. 시간은 여전히 멈춰 있었다. 오후 3시 12분. 동생이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시각이었다.
세아가 시계를 손에 쥐는 순간, 가게 안의 정지된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멈춰 있던 탁상시계의 초침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려다 다시 멈췄다. 주변의 빛이 희미해지더니, 시계에서 아주 약하고 아련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작은 영상을 만들어냈다. 흐릿했지만 분명했다. 흙투성이의 작은 손이 시계를 쥐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다. “누나, 이거 봐! 아빠가 그랬는데, 이 시계는 시간을 멈출 수 있대!”
세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동생의 목소리, 동생의 얼굴. 시간 속에 갇혀 영원히 꺼낼 수 없을 줄 알았던 그 순간이 눈앞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 환영을 잡으려 했다. 만질 수 없는 허공을 헤맬 뿐이었지만, 그녀는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여 마치 동생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준은 조용히 세아를 지켜보았다. 그 역시 비슷한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이곳 골동품 가게의 물건들은 단순히 낡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잊힌 시간의 조각들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물건은, 이처럼 그 시간을 붙잡아두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저 아련한 잔상처럼, 다시 한번 경험하게 해줄 뿐.
동생의 영상은 점점 희미해졌다. 시계의 빛도 사그라들었다. 세아는 허탈한 듯 손을 내렸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지만, 어딘가 오랜 갈증이 해소된 듯한 평온함이 감돌았다.
“이 시계는… 그저 그 시간을 보여줄 뿐입니다. 바꿀 수는 없어요.” 서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시간 속의 기억은, 이제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었으니, 더 이상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세아는 시계를 품에 안았다. 여전히 멈춰 있는 오후 3시 12분. 그 시간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상처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조각을 다시 찾은 듯한 충만한 감각에, 세아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안에서 시계는 희미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이 주는 따뜻한 위로였다.
세아는 결심한 듯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계…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부터 주인을 찾아갈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물건이니, 그저… 영원히 소중히 간직해 주십시오.”
세아는 시계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가게를 나섰다. 맑게 울리는 종소리가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했다. 서준은 다시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멈춰 있던 11시 37분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가게 안의 공기가 전보다 한결 가벼워진 듯한 착각에 잠시 잠겼다. 그는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녹차는 여전히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김 속에서, 또 다른 잊힌 시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