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비록 계절은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봄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은 마치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잔뜩 찌푸려 있었고, 가끔씩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조각들을 휘몰아쳤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낡은 액자 속에는 앳된 얼굴의 수현과 자신이 웃고 있었다. 배경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언덕, 그리고 그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을 맞으며 활짝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겨울 꽃들. 그날이었다. 하얗게 부서지던 눈꽃 속에서,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영원을 약속했던 날.
“보고 싶다, 수현아…”
낮게 읊조린 그의 목소리에는 천오백 번이 넘는 겨울밤을 홀로 견뎌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약속은 시간과 함께 바스러지는 모래알 같았고, 지훈은 그 약속의 파편들을 주워 담느라 자신마저 닳아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따뜻한 차 향기가 방안을 채웠다. 미소를 머금은 채 들어선 사람은 윤 박사였다. 늘 한결같은 온화한 미소를 지닌 그였지만, 지훈은 그의 눈빛 속에 담긴 미묘한 긴장을 읽어냈다. 어쩌면 오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비밀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오셨어요, 박사님.”
“그래, 지훈아. 오늘은 좀 괜찮은가?”
윤 박사는 차가 담긴 찻잔을 지훈의 앞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찻잔에서 피어나는 김이 뿌연 안개처럼 지훈의 시야를 가렸다. 마치 진실을 가리는 장막 같았다.
“늘 같습니다. 수현이가 남긴 마지막 말… 그리고 그 약속…”
지훈은 사진 속 수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그때, 윤 박사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훈아, 사실… 그날의 약속에 대해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그가 모르는 것?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약속만을 붙들고 살아온 자신에게, 과연 무엇이 더 숨겨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박사님… 무슨 말씀이신지…”
“수현이는, 네게 말하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있었어. 그날의 약속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켜질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윤 박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낡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지훈의 앞에 밀어놓았다. 봉투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은… 수현이가 너에게 전해달라고 했던 거야.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여러 장의 종이와 함께 얇은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는 비디오테이프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제야 그는 봉투의 맨 위에 놓인, 수현의 글씨로 쓰여진 쪽지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지훈에게”
나의 지훈아, 이 편지를 네가 읽을 때쯤이면 나는 어쩌면 네 곁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해. 너무나도 미안해.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그 아름다운 언덕에서, 나는 너에게 영원히 함께할 것을 약속했지. 그 약속은 내 진심이었어. 단 한 순간도 거짓이 아니었어.
하지만 지훈아, 나는 그날 너에게 감춰야 할 사실이 있었어. 내 몸에 깊이 자리 잡은 그림자, 그것이 얼마나 나를 갉아먹고 있는지 말할 수가 없었어. 너에게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순간을 병마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그 약속을, 어쩌면 나 혼자 지킬 수밖에 없는 약속으로 만들었어.
이 비디오에는 내가 너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나의 마지막 모습들이 담겨 있어. 그리고 이 서류들은… 나를 둘러싼 모든 진실을 담고 있지. 부디, 너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던 나의 이기심을 용서해 줘. 그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 줘.
잊지 마, 지훈아.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했어. 그리고 우리의 약속은, 비록 형태는 달라졌지만… 영원히 너의 마음속에 눈꽃처럼 피어 있을 거야.
수현이가.
쪽지는 지훈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눈은 이미 뜨거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켜질 수 없는 약속. 병마. 이기심. 수현이 혼자 짊어졌던 그 무거운 진실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그는 비디오테이프를 움켜쥐었다. 낡은 테이프 속에는 수현의 마지막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도 지훈을 향한 그녀의 변치 않는 사랑이 담겨 있을 터였다. 윤 박사는 지훈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그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수현이는 네가 슬퍼하기보다, 그 진실을 알고 새로운 시작을 하길 바랐어.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를 생각했다. 그 약속은… 지훈아, 너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수현이의 마지막 당부였던 거야.”
창밖으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쳤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지훈의 마음속에도, 비로소 작은 온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옥죄었던 약속의 의미가, 이제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더 이상 그를 얽매는 족쇄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는 수현의 마지막 사랑이자 선물이었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수현의 손을 잡았던 그 순간이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제 그는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날의 약속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그 약속을 가슴에 품고 다시 세상을 살아갈 준비를 할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비디오테이프가, 새로운 진실의 문을 열 열쇠처럼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의 하늘은 여전히 흐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조용히 눈이 그치고 햇살이 내리는 듯했다. 그 약속은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