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빛 항구에서 찾은 숨결
햇살이 여물어가는 늦은 오후, 어촌 마을의 작은 항구는 생선 비린내와 짭조름한 바다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엄마는 좌판에 늘어선 싱싱한 해산물 앞에서 연신 감탄사를 뱉었고, 아빠는 흥정하는 엄마 옆에서 지갑을 든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여덟 살 막내 동생 지호는 오징어 말리는 덕장 사이를 뛰어다니며 깔깔거렸고, 열두 살 민서는 새까만 해녀 할머니의 바구니에서 조약돌처럼 예쁜 조개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든 소음의 한가운데서, 열여덟 살 혜진은 그저 고요를 갈망했다.
“엄마, 저 저기 좀 가서 앉아 있을게요.”
“어디? 위험해! 멀리 가지 마. 여기 사람들 너무 많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엄마의 걱정 어린 잔소리는 혜진의 귀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여기가 다 똑같지 뭐.’ 혜진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가족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구 끝자락으로 향했다. 매번 여행 올 때마다 겪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한 것이 마냥 좋았는데, 사춘기의 정점에서 맞이하는 가족 여행은 그야말로 소음의 향연이었다.
낡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부두의 가장자리, 아무도 찾지 않는 듯한 녹슨 벤치에 앉았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소음이었다. 혜진은 휴대폰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요즘 제일 좋아하는 인디 밴드의 음악이 귓속을 채우자 비로소 세상과 차단된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수평선 위로 해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바다를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은 언제 봐도 경이로웠다. 문득,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소음과 번잡함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듯 느껴졌다.
음악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가족 여행은 항상 이럴까. 다들 좋다고 떠나오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피로감과 자잘한 다툼뿐인 것 같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멋대로 뛰어다니고… 그 사이에서 자신은 마치 투명 인간처럼 붕 뜨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밀린 숙제와 시험의 압박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여기서 이렇게 엉뚱한 감정 소모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공허했다.
“아가씨, 혼자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고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벤치 옆, 낡은 그물망을 손질하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혜진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굴에는 평생을 바다와 함께한 듯 깊게 패인 주름들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혜진은 당황해서 이어폰을 뺐다.
“아… 그냥요. 노을이 예뻐서 보고 있었어요.”
“허허, 예쁘지. 이 노을 보러 이 먼 항구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자네는 행운아야.”
할아버지는 능숙한 손길로 찢어진 그물코를 엮어가며 말했다. 혜진은 할아버지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물 한 코 한 코에 할아버지의 삶의 연륜이 담겨 있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매일 이 노을을 보시겠네요.” 혜진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럼. 지겹도록 보지. 그런데도 볼 때마다 새로워. 바다는 매일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주거든. 저 소리들도 마찬가지고.” 할아버지는 멀리서 들려오는 항구의 활기찬 소음을 가리켰다. “시끄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게 다 살아있는 소리야. 사람 사는 소리, 배 들어오는 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 다 합쳐져야 진짜 항구가 되는 거지.”
혜진은 할아버지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사람 사는 소리…’ 자신에게는 그저 거슬리는 소음이었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살아있는 소리’이자 ‘진짜’를 이루는 일부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자신은 너무 한 방향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 아닐까. 가족들의 시끌벅적함도, 어쩌면 그들의 ‘살아있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진아! 혜진아!”
엄마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아빠와 지호, 민서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분명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혜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어이구, 아가씨 가족들이 찾는가 보네. 얼른 가보게. 걱정하겠다.”
혜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가족들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해는 수평선 가까이 내려앉아 바다를 온통 붉은 비단처럼 물들이고 있었다. 가족들은 멀리서 혜진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엄마의 얼굴에는 안도와 함께 살짝 짜증 섞인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 갔었어! 엄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전화도 안 받고!”
아빠는 혜진의 어깨를 토닥였고, 지호는 “누나! 어디 갔다 이제 와!” 하며 팔에 매달렸다. 민서는 그저 혜진을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또 잔소리라고 생각하며 짜증을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엄마의 잔소리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깊은 걱정과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이게 가족의 소리구나.’ 혜진은 불현듯 깨달았다. 서로를 걱정하고,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가 없으면 허전해하는… 그 모든 시끌벅적함이 바로 자신들이 ‘살아있는 가족’이라는 증거였다.
“미안해, 엄마. 노을이 너무 예뻐서… 잠깐 멍하니 보고 있었어.” 혜진은 진심으로 미안한 듯 말했다. 엄마는 혜진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혜진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고, 익숙한 온기가 전해졌다.
“됐어. 찾았으니 됐지 뭐. 다들 같이 노을이나 보자.”
다섯 식구는 나란히 부두 가장자리에 섰다. 붉게 타오르던 해는 기어이 수평선 너머로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마지막 빛줄기가 길게 드리워진 바다 위로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도, 서로의 어깨가 맞닿고, 작은 속삭임이 오가고, 지호의 투정 섞인 질문이 터져 나오는… 가족만의 시끌벅적함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혜진은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시끌벅적한 가족 여행이 언젠가 추억이 되어 돌아올 때, 이 노을빛 항구에서의 짧은 순간이, 어쩌면 자신을 가장 깊이 이해하게 만든 깨달음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고요 속에서가 아니라, 이 ‘살아있는 소리’들 속에서, 진정한 평화와 함께라는 의미를 찾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항구의 노을은 깊어지고, 가족의 이야기는 또 한 페이지를 채워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