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이정표는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 색이 바래고 글씨마저 희미했지만, 지훈의 눈에는 그 어떤 지도보다 선명했다. ‘별바라기 언덕’. 그의 심장이 메마른 땅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울렸다. 수십 년의 추적, 수백 번의 실망, 셀 수 없는 밤을 지새우며 그려왔던 은서의 얼굴이 안개처럼 그의 시야를 감쌌다.
차 문을 열자 눅눅한 바닷바람이 훅 끼쳐왔다. 짠 내음과 오래된 숲의 흙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그와 은서가 어린 시절,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영원을 약속했던 장소였다. 버려진 등대처럼, 시간 속에 잊혀진 약속. 하지만 지훈은 단 한 번도 그 약속을 놓은 적이 없었다. 마지막 단서가 이 언덕 위, 폐허가 된 옛 천문대로 그를 이끌었다.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발아래 부스러지는 마른 나뭇가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낡은 천문대의 돔형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훈은 숨을 멈췄다. 녹슨 철문은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은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했다. 먼지 낀 망원경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지훈은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희미한 달빛이 깨진 유리창을 통해 들어와 벽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의 눈은 익숙한 곳을 향했다. 십대 시절, 은서와 단둘이 밤을 새우며 별자리를 이야기하던 작은 틈새 공간. 그들은 그곳에 미래의 꿈을 적은 쪽지를 숨기곤 했다. 손전등을 비추자, 닳아 해진 벽돌 틈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벽돌을 빼냈다. 차가운 흙먼지가 손에 묻어났다. 벽돌 뒤에는 예상했던 대로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이 상자를 찾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매었던가. 손끝으로 상자의 표면을 쓸어보니, 오래된 나무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첫째, 보랏빛으로 바랜 물망초 한 송이. 그가 은서에게 주었던 꽃,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그 꽃이었다. 둘째, 작고 낡은 은빛 로켓 팬던트. 그의 첫 월급으로 사주었던, 은서가 늘 목에 걸고 다니던 그것. 그리고 마지막, 반으로 곱게 접힌, 약간 누렇게 변색된 종이 한 장이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종이의 한쪽 면에는 그들이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이 천문대가 연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림 속 천문대 한쪽 벽면에, 아주 희미하게, 그가 알지 못했던 작은 창문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의 뒷면, 낯설지 않은 은서의 필체로 단 한 줄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잉크의 색깔이 달랐다. 분명 나중에 추가된 글씨였다.
“다시, 저 별 아래서. S.”
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S’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이름의 이니셜인가? 아니면 어떤 암호인가? 다시 저 별 아래서. 그것은 재회에 대한 희망인가, 아니면 영원한 작별의 메시지인가? 이 작은 창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그림과 문장은 은서가 이곳에 왔었음을, 그리고 그녀가 여전히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S’는 누구인가?
오랜 추적 끝에 얻은 결정적인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가슴에는 해결보다는 더 깊은 미궁이 펼쳐지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천문대 그림 속, 낯선 창문에 고정되었다. 이 창문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창문이었다. 은서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긴 여정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