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의 조각
지우의 손은 차가운 찻잔을 감싸고 있었지만, 온기는 좀처럼 스며들지 않았다. 찻잔 너머로 하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 보였고, 그 무게는 지우의 심장까지 짓눌렀다. 창밖으로는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작은 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지난밤, 미진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들의 모든 평화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하준 씨, 정말… 미진 씨가 그 말을 했던 건가요?” 지우는 목소리를 억지로 낮췄다. 떨림을 숨기기 위해 애썼지만, 미세한 파동은 어쩔 수 없었다. 하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지우에게는 확신이나 다름없었다.
어제, 잊혔던 이름,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이 불쑥 나타나 하준의 과거를, 아니, 그들의 미래를 흔들었다. 미진은 오래전 하준의 사업 파트너이자 옛 연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와, 하준이 한때 그녀와의 약속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는 ‘사라진 계약서’의 행방을 물었다. 그 계약서가 세상에 드러나면, 하준이 현재 추진 중인 모든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될 터였다. 더 나아가, 그들의 평범한 삶마저 위협받을 수 있었다.
“난… 지우 씨를 만나기 전, 다른 사람이었어요.” 하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때는 앞만 보고 달렸어요. 성공만이 전부인 줄 알았죠. 미진 씨와는… 그런 관계였어요.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는.”
지우는 눈을 감았다. 알고 있었다. 하준의 과거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도 어둡고 복잡한 시간이 있었음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진의 등장은 그 짐작을 현실로, 너무나 생생한 고통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계약서는… 왜 미진 씨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거죠? 그리고 왜 이제 와서….” 지우의 질문은 비난이 아니었다. 단지 이해하고 싶었다. 그를 믿고 싶었다.
하준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깊은 수렁 같았다. “그 계약서는 나에게도 없어요. 미진 씨에게도, 우리 둘 다 가지고 있지 않아. 사라졌어요. 그게 문제예요.” 그의 얼굴에는 회한과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가 헤어진 후, 미진 씨가 사업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그 계약서를 이용하려 했을지도 몰라요. 미진 씨는 그걸 내가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지우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누군가? 그들의 관계를, 그리고 하준의 현재를 위협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 ‘밤기차’에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거대한 음모의 한 조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럼… 미진 씨는 어디서 그 계약서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지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진이 어제 밤 지우에게 던진 날카로운 시선과 비아냥거림이 떠올랐다. ‘하준 씨의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니… 정말 어리석군.’
하준은 한숨을 쉬었다. “미진 씨는 내가 당신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모든 과거를 은폐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증거가… 당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어.”
지우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에게? 자신이 왜? 하준을 만나기 전의 지우는 평범하고, 어쩌면 나약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인연의 시작이었던 그 밤기차 이전에는, 하준의 복잡한 세계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 중요한 계약서가 있다는 말인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돼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뭘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지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그제야 하준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는지, 왜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모든 혼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것이다.
하준은 지우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손은 뜨거웠다. “나도 몰라요. 하지만 미진 씨는 확신하고 있어. 누군가 그녀에게 그렇게 믿게 만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의 최종 목적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하준의 눈 속에는 지우를 향한 깊은 사랑과 동시에, 감당하기 힘든 어둠이 서려 있었다. 이 미스터리한 계약서가 정말 지우에게 있다면, 혹은 지우와 관련된 무언가라면… 그들의 인연은 과연 재앙이었을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풀어낼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창밖의 비는 더욱 거세졌다. 밤은 깊어지고, 그들의 앞에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길만이 놓여 있는 듯했다. 지우는 하준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찻잔에서 전해지지 않던 온기가, 그의 손을 통해 심장으로 번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밤,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관계는 과거의 그림자에 먹혀 사라질 운명일까?
그때, 현관문 쪽에서 띠리링- 하는 벨소리가 울렸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지우와 하준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지우는 하준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서 깊은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미진일까? 아니면, 계약서의 행방을 조작하여 그들을 이 혼란으로 몰아넣은 또 다른 누군가일까?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인연은, 이제 막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