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관의 문이 스르륵 열리자, 낡은 종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먼지 낀 공기 속으로 희미한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왔다. 은주는 문턱을 넘어섰다. 코끝에 훅 끼쳐오는 낡은 종이와 현상액 냄새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은 희미했지만, 그들의 젊음과 행복만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쪽 작업실에서 나온 백발의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박 사장님이었다. 수십 년간 이 사진관을 지켜온 그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삶과 기억을 렌즈에 담아왔을 터였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지나간 세월의 깊이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혹시… 박 사장님이세요?” 은주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그럼요. 이 낡은 사진관의 유일한 주인이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박 사장님이 푸근하게 웃으며 오래된 나무 의자를 권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오래된 사진 복원이라도 하려는 건가?”
은주는 조심스럽게 손에 든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갓 스무 살을 넘긴 듯한 젊은 남녀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은주의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얼굴이 희미하게 가려진 채 서 있는 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평생 이 사진 속 여인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은주에게 이 여인은 늘 마음 한구석에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남아있었다.
“이 사진… 혹시 여기서 찍은 건가요? 제가 어릴 때부터 봐온 유일한 가족사진인데… 부모님께서는 이 사진만 보면 늘 말이 없으셨어요. 특히 가운데 이분은… 누가 보더라도 저희 엄마와 너무 닮았는데, 한 번도 엄마의 자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어요.”
박 사장님은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일순간 깊어지는 것을 은주는 느꼈다. 낡은 사진관의 냄새만큼이나 아련한 침묵이 흘렀다.
“음… 이 사진은… 분명히 우리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 맞습니다. 배경에 보이는 작은 나무와 저 뒤 창문 모양새를 보니 틀림없어요. 렌즈도 내가 쓰던 것이 맞고. 하지만… 이 분은…”
박 사장님의 손가락이 사진 속 세 번째 여인을 가리켰다.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마치 오래된 기억의 서고를 뒤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기억납니다.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던 사진이었죠. 이 젊은 두 분은… 은주 씨 부모님이 맞으시죠? 그리고 이분은… 김지혜 씨. 은주 씨 어머니의… 쌍둥이 언니였습니다.”
은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쌍둥이 언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쌍둥이요?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외동딸이라고, 늘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박 사장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쉽게 말할 수 있는 사연이 아니었을 겁니다. 젊은 시절의 저는 그저 셔터만 눌렀지만, 사람들의 사연은 사진 속 표정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있는 법이죠. 그날… 그러니까 40년도 더 된 그때, 세 분이 사진관에 오셨어요. 젊은 은주 씨 부모님과 지혜 씨. 세 분은 웃고 있었지만, 지혜 씨의 눈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죠.”
박 사장님은 천천히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은주의 부모님과 김지혜 씨는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특히 지혜 씨와 은주의 어머니는 외모는 물론 마음까지 똑 닮은 쌍둥이였다. 하지만 불운은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그때, 은주 씨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어요. 아주 위독해서… 살 가망이 거의 없다는 판정을 받았죠. 유일한 희망은 골수 이식뿐이었는데, 쌍둥이인 지혜 씨가 기증자가 되기로 자원했습니다.”
은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렇게 심하게 아팠었다니, 그리고 그런 희생이 있었다니. 이 모든 것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은주 씨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죠. 하지만… 지혜 씨는 수술 후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박 사장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오래된 사진관에는 옅은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 분이 이 사진을 찍은 날은,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함께 웃는 모습을 남기고 싶다며 찾아왔던 날이었어요. 지혜 씨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 동생이 살아갈 것을 알면서도, 그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을 보여주려 애썼지만, 렌즈를 통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애틋함이 가득했죠.”
은주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왜 이 사진에 대해 입을 닫았는지.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 언니의 희생. 그리고 그 희생 위에 세워진 삶. 얼마나 무겁고 아픈 비밀이었을까.
“사진을 현상해서 돌려줄 때, 은주 씨 아버지가 제게 부탁했어요.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특히 나중에 태어날 아이에게는 더욱더. 딸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지혜는 그저 동생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별로 남고 싶어 할 거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박 사장님은 서랍을 열어 낡은 앨범을 꺼냈다. 그 안에는 김지혜 씨의 선명한 독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진 속 지혜 씨는 은주의 어머니와 너무나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 사진은… 지혜 씨가 혼자 와서 찍었던 사진입니다. 수술 며칠 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싶다면서… 웃었지만,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초월한 듯했어요.”
은주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 지혜 씨의 눈동자가 깊은 이해와 용서로 그녀를 바라보는 듯했다. 엄마의 외동딸로 살아왔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깊은 사랑과 유대감이 그녀를 감쌌다. 자신은 두 명의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 명은 낳아준 어머니, 다른 한 명은 그 생명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을 바친 어머니.
오래된 사진관의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사진관은 그저 빛을 담는 곳이 아니었다. 잊히지 않는 시간과, 감춰진 슬픔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뒤섞인 기억의 저장소였다.
은주는 비로소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오래된 질문의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 답은 그녀의 삶을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었다. 박 사장님은 말없이 은주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수많은 세월과 사연을 담고 있는, 깊고도 따뜻한 호수 같았다. 은주는 지혜 씨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길 잃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