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357화

김현우는 낡은 서류철을 넘기다 손을 멈췄다. 종이 냄새, 먼지 냄새, 그리고 그의 지쳐버린 마음에서 피어나는 체념의 냄새가 뒤섞여 희미한 공간을 채웠다. 눈앞에는 수십 년 전 부산의 작은 구립 도서관 회원 명부가 펼쳐져 있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훑어봤을 법한 닳고 닳은 기록들. 그 속에서 이지혜라는 이름 석 자를 찾아 헤맨 지가 벌써 얼마인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통째로 집어삼킨 이름, 그 그림자를 좇아 스스로를 기어이 탐정이라는 길고 외로운 직업 속으로 밀어 넣은 지 오래였다.

창밖으로는 한낮의 햇살이 기울어 창틈으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그의 심장은 이제 뜨거운 열정보다는 끈질긴 습관으로 뛰고 있었다.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이토록 오랫동안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는데, 과연 그가 놓치지 않았을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기나 한 걸까. 의심은 검은 구름처럼 몰려와 그의 시야를 가렸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일은 이제 삶의 목적을 넘어, 스스로를 벌하는 형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느릿한 손길로 다음 장을 넘겼다. 한글과 한자가 뒤섞인 빽빽한 필체들. ‘문예반’, ‘향토사 답사반’, ‘봉사 동아리’… 젊은 시절의 열정과 순수함이 스며있는 듯한 활동 기록들. 그때 문득, 그의 시선이 한 줄에 꽂혔다. ‘손수건 수집 동호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 옆에, 한 손으로 대충 휘갈겨 쓴 듯한 작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 메모는 지혜의 이름 바로 옆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박미정’이라는 이름 옆에 연필로 작게 쓰여 있었다. 거의 지워지다시피 한 글자들. 현우는 몸을 숙여 눈을 가늘게 떴다.

「멜로디 상자 수리 문의 – 지혜 소개」

‘멜로디 상자.’ 그 두 단어가 마른번개처럼 현우의 심장을 갈랐다.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먼지 쌓인 공기는 신선한 산소로 변하는 듯했다. 마치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고대 유물이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멜로디 상자’라니. 단순히 ‘오르골’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혜는 언제나 그것을 ‘멜로디 상자’라고 불렀었다.

머릿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갔다.

“현우야, 내 멜로디 상자 말이야. 할머니가 주신 건데, 고장 나서 소리가 제대로 안 나. 고칠 수 있을까?”

수줍게 웃으며 작은 나무 상자를 건네던 지혜의 모습. 손바닥만 한 상자 안에서 낡은 태엽이 돌아가며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뱉던 기억. 맑은 음색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울다가 지친 아이의 흐느낌 같은 소리만 간신히 흘러나왔었다.

“음… 고치려면 좀 전문가한테 맡겨야 할 것 같은데?”

현우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여다봤지만, 기계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응… 나 아는 분이 부산진시장 근처에 오래된 오르골 수리하는 곳이 있다고 했어. 거기 한번 가볼까?”

지혜의 눈은 그 상자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에게 그 멜로디 상자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보물이었다.

그녀가 고장 난 멜로디 상자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부산진시장을 향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도 함께 따라가겠다며 어리숙하게 웃던 스무 살의 현우가 있었다. 지혜가 박미정이라는 친구에게 수리점을 소개받아 갔던 것일까? 아니면 박미정이 지혜의 소개로 그 수리점을 찾았던 것일까? 중요한 것은 ‘멜로디 상자’와 ‘지혜’라는 두 단어가 한 공간에서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굳게 닫혔던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는 듯했다.

현우는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열정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피로와 절망감은 온데간간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부산진시장, 오래된 오르골 수리점. 그곳은 분명 지혜의 흔적을, 어쩌면 그녀의 행방을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명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마치 수십 년 전의 자신에게 닿는 듯한 기분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현우는 지친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어느새 붉은 노을로 물들고 있었다. 해 질 녘의 도시는 그에게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는 지체 없이 낡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어둠이 내려앉기 전, 이 실낱같은 희망을 좇아 그는 또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혜야, 이번에는 정말… 이번에는 너를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