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126화

차가운 바람이 기와지붕 아래 텅 빈 처마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청솔재(靑松齋)의 겨울은 늘 그랬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혹독하게 지은의 마음을 할퀴는 듯했다. 낡고 오래된 한옥의 마루에 털썩 주저앉은 지은의 어깨는 잔뜩 웅크러져 있었다. 눈앞에는 전문가들이 표시해 둔 붉은색 스프레이 자국이 선명했다. 집의 대들보, 바로 이 천년 세월을 견뎌온 집의 척추가 썩어 있다는 판정이었다. 대체불가. 그 네 글자가 지은의 눈앞에서 거대한 먹구름처럼 번져갔다.

몇 년째 온 마음을 다해 복원해 오던 청솔재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남긴 유일한 유산이자, 지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낡은 대들보를 새로 갈아 끼우는 일은 단순히 비용 문제를 넘어선 난관이었다. 전통 방식 그대로 복원하려면 최소한 수십 년 이상 된 육송(陸松)이 필요했고, 그런 자재는 씨가 마르다시피 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고집불통 이장님과 마을 원로들의 따가운 시선도 지은을 짓눌렀다.

“함부로 현대식으로 고치려 들면 안 돼. 조상들의 혼이 깃든 집이야.”

이장님의 말은 비수처럼 박혔다. 물론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은은 마른세수를 했다. 먼지 앉은 손바닥에서 흙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결국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설계도를 고치고, 낡은 기와를 하나하나 손질하며 꿈꿨던 미래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어둠이 서서히 청솔재의 마당을 잠식해 들어갈 때, 지은은 묵직한 물건 하나를 품에 안았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었다. 닳고 닳은 가죽 표지는 할머니의 손때와 지은의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이 일기장은 지은에게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막막한 길을 헤맬 때마다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던 할머니의 목소리이자, 청솔재에 얽힌 비밀의 열쇠이기도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지은은 촛불을 밝히고 일기장을 펼쳤다. 할머니의 필체는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정하고 힘이 있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다. 손가락이 닿은 곳에는 다음과 같은 날짜가 적혀 있었다. ‘단기 4278년 11월 20일’.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의 기록이었다.

***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밤새 몰아친 폭풍우에 서까래 두 개가 통째로 내려앉았다. 기와는 산산조각이 났고, 마루는 빗물에 흥건히 잠겼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이 집, 청솔재가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니 그저 눈물만 흘렀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아무리 사내없이 홀로 지킨다 한들, 저 집이 이제 버틸 리 있겠나.” 그들의 동정 섞인 시선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나 또한 그리 생각했다. 어린 두 아이를 먹여 살리기도 버거운 살림에,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새도록 잠 못 들고 뒤척였다.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는가. 내 아버지의 혼이 깃든 이 집을, 이대로 허물어야 하는가.

새벽녘, 아버지가 생전에 그리도 아끼시던 뒷마당 장독대 옆 작은 창고로 발걸음이 향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모르겠다. 낡은 빗장을 열고 들어서니 퀴퀴한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 쌓인 가구들과 잊힌 살림살이들 틈에서, 나는 묵직한 나무토막 하나를 발견했다. 꼼꼼하게 새끼줄로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던 나무.

놀랍게도 그것은 평생을 마르지 않고, 휘어지지 않으며 집을 지키는 대들보감으로 쓰인다던 ‘쇠솔(鐵松)’이었다. 아버지가 30년 전부터 몰래 베어와 말리고 깎아 두었던, 그렇게 나중에 혹시나 모를 집 수리에 쓰고자 아껴두었던 나무였다. 아버지는 그때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일까. 언젠가 이 집이 나처럼 위태로워질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그 나무를 끌어안고 나는 한참을 울었다. 이것은 그저 나무토막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 그리고 이 집의 세월이 내게 건네는 마지막 희망이자 지혜였다. 집은 단지 기둥과 서까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대를 거듭하며 쌓아 올린 끈기와 지혜, 그리고 희망으로 버티는 것이었다. 폭풍은 지나갔고, 집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새로운 대들보가 청솔재의 척추가 되어, 앞으로 올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

일기장 구절을 다 읽은 지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겪었던 그 절망감,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듯했다. 쇠솔. 쇠처럼 단단하다는 뜻의 그 나무는,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귀한 목재였다. 할머니의 일기장이 말하는 ‘뒷마당 장독대 옆 작은 창고’. 어릴 적 할머니가 늘 ‘보물 창고’라고 부르며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그곳이 떠올랐다.

지은은 벌떡 일어났다. 오랜 세월 닫혀 있던 그 창고는 청솔재 복원 과정에서 낡은 물건들을 치우느라 잠시 문이 열렸을 뿐, 제대로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그곳에 할머니의 아버지가 숨겨둔, 할머니가 다시 세운 청솔재의 ‘쇠솔’이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창고에 또 다른 할아버지의 흔적, 혹은 할머니가 미처 다 사용하지 못했던 또 다른 ‘희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지은의 심장을 두드렸다.

찬 바람이 다시 불어왔지만, 더 이상 지은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지은에게 건네는 변치 않는 사랑과 용기의 메시지였다. 이 집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은 또한 할머니처럼, 이 청솔재를 다시 세워낼 것이다.

지은은 촛불을 든 채 뒷마당 장독대 옆, 굳게 닫힌 작은 창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낡은 빗장을 열었다. 그 안에서 과연 무엇이 지은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오래된 집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