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허파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시간의 경계, 기억의 심장이었다. 리안의 심장은 고대 유적의 박동처럼 불규칙하게 울렸다. 수없이 많은 시간의 흐름을 건너왔지만, 이곳만큼 존재의 심연을 흔드는 곳은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서 있는 카이가 있었다. 그의 눈빛은 걱정으로 일렁였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어떤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준비됐어?” 카이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리안이 미처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수백 년 동안 이 순간을 갈망해왔다.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아 헤매던 무수한 밤, 알 수 없는 공허함에 시달리던 나날들. 모든 것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어쩌면 끝날지도 모른다.
거대한 돌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응축된, 살아있는 기억의 결정체 같았다.
리안은 심호흡을 했다. 손끝이 저릿했다. 잃어버린 과거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두려움과 기대, 혼란과 해방감. 온갖 감정이 뒤섞여 그녀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그녀는 카이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던졌다. 카이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 짧은 접촉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어둠 속으로 향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빛이 가득한 기억의 회랑으로 발을 내딛자, 세상은 이내 색과 소리의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억의 심연으로
회랑은 끝없이 이어지는 거울들로 이루어진 듯했다. 거울마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 다른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낯선 사람들의 웃음소리, 절규, 전쟁의 포화, 희미한 자장가 소리… 모든 것이 뒤섞여 거대한 교향곡을 이루었다. 리안은 혼란스러운 시각과 청각의 홍수 속에서 휘청거렸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기억인가, 아니면….
순간, 모든 소리가 잦아들고 하나의 영상이 선명해졌다. 푸른 하늘 아래,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언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한 아이가 서 있었다. 작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맑게 웃는 아이. 그 아이의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치밀어 올랐다.
“엄마!”
귓가에 울리는 맑은 목소리. 리안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엄마? 누구의 목소리인가. 이 아이는 누구이며, 왜 그녀의 가슴을 이토록 아프게 두드리는가.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작은 몸으로 언덕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리안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쫓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아이의 머리카락, 작게 뻗은 손, 웃음소리. 모든 것이 고통스러울 만큼 생생했다. 마치 오랜 꿈속에서 깨어나려 애쓰는 것처럼, 그녀는 이 기억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점차 아이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똘망똘망한 눈, 조그마한 코, 그리고 리안의 얼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던 듯한 친숙한 입매. 아이는 웃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는 리안의 얼어붙은 감각을 녹이는 듯했다.
그때, 풍경이 일그러졌다. 따뜻한 햇살은 사라지고 회색빛 하늘이 드리웠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리고, 언덕은 흙먼지로 뒤덮였다. 아이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작은 어깨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리안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닿아야 했다. 이 아이에게 닿아서,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아이를 보호해야 했다.
무너지는 진실
“가지 마! 엄마…!”
아이의 절규가 귓전을 때렸다. 리안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아이의 앞에서, 누군가가 멀어지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가며 뒤돌아보지 않는 뒷모습. 그 등은 익숙했다. 그녀는 그 등에서 자신을 보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듯, 자신의 모습이 아이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보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내가 저 아이를 두고 떠났다고? 기억의 파편들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폭탄처럼 머릿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방에서 터지는 섬광과 굉음.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어떤 장치. 그것은 시간을 조종하는 기기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작동시키고 있었다.
또 다른 영상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 정교한 기계장치들, 그리고 누군가의 절박한 목소리.
“이 아이를 지켜야 해, 리안! 미래를 위해, 우리가 실패한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선… 이 아이만이 희망이야.”
희망. 그 단어가 낯설면서도 뼈아프게 박혔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단순한 딸이 아니었다. 그녀의 임무와 관련된, 어쩌면 시간 여행자로서의 그녀의 존재 이유와 연결된 중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왜, 왜 그녀는 이 아이를 떠났던가.
“리안… 너의 기억은 조작되었다. 너는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을 잊도록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낮고 깊은 목소리였다.
고통스러운 부분? 아이를 버린 기억? 그녀의 손이 저절로 입을 틀어막았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사랑을 갈구하고,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헤매던 자였다. 그런 자신이 한 아이를, 그것도 자신의 아이로 추정되는 존재를, 그것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버리고 도망쳤다니.
주변의 풍경이 다시 변했다. 이제는 붉은빛으로 물든 폐허였다. 그리고 그 폐허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아이.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슬픔보다 더 깊은, 버림받은 존재의 차가운 절망이 서려 있었다.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때, 아이의 옆에 또 다른 형체가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어둡고 위협적인 존재. 리안의 기억 저편에서 떠오르는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뒤틀고 파괴하려 했던, 그녀의 숙적이었다.
“아니…!” 리안은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 그녀의 기억이 봉인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그녀의 임무의 핵심이었던 그 아이를 지키지 못하고, 심지어 버려두고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적의 손에 넘어간 것인가.
새로운 결심
모든 영상이 폭발하듯 사라지고, 리안은 다시 기억의 회랑 속에 홀로 남았다. 푸른빛은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지만, 이제 그 빛은 따뜻하기보다는 차갑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 속에서 칼날이 휘저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잊고 싶었던 진실은 언제나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찾아오는 법이었다.
“리안!”
멀리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언제부터 이곳에 와 있었을까. 그의 품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그의 온기가 비로소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억눌렀던 울음을 터뜨렸다.
“카이… 내가… 내가 그 아이를….” 그녀의 목소리는 산산조각 났다.
카이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모든 진실을.
울음이 잦아들자, 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달랐다. 절망 속에서도 단단한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헤매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녀는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왜 잃었는지 알았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난 돌아가야 해.”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를 찾아야 해. 내가 실패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해.”
카이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회한과 함께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알고 있었어. 네가 이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 카이가 말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야, 리안. 그 아이는… 네가 떠난 후, 많은 것이 변했어.”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변했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버렸던 아이야. 내가 되찾아야 해. 설령 그 아이가 나를 미워하더라도, 내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해.”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이의 텅 빈 눈동자가 다시 떠올랐다. 절망과 배신감으로 가득했던 그 눈. 그녀는 다시 한번 일어섰다. 몸 안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그리고 그 임무는 이제 그녀의 존재 이유가 될 터였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뒤틀린 시간을 바로잡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어둠의 입구 너머, 알 수 없는 미래가 기다리는 곳을 응시했다. 제1143화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