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가장 후미진 골목, 낡고 빛바랜 간판이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겨우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 그 이름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공간이, 이 회색빛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간직한 것처럼 보였다.
화가 이선우는 그림자처럼 그 간판 아래 서 있었다. 그의 삶은 몇 년 전부터 단조로운 흑백 사진이 되어버렸다. 붓을 들면 캔버스에는 늘 무채색의 풍경만이 그려졌다. 한때 세상을 경탄시켰던 그의 생동감 넘치는 색채는, 사랑하는 딸 하은이를 잃은 날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는 딸의 마지막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이 상점을 찾아왔다. 선명한 색을 사랑했던 하은이, 작은 손으로 알록달록한 크레파스를 쥐고 미소 짓던 그 모습을. 이제는 흐릿한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무거운 나무 문을 밀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향과 알 수 없는 향기가 뒤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상점 내부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수정구슬과 기묘한 조형물들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숨 쉬는 듯했다. 선반 위에는 이름 모를 작은 유리병들이 가득했는데, 투명한 병 속에는 마치 살아있는 빛깔처럼 아련히 흔들리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꿈의 조각들이었다.
카운터 뒤편에서 한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지만, 눈빛은 별처럼 형형했다. 옅은 미소와 함께,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이 울렸다.
“오셨군요. 꽤 오래 기다렸습니다, 화가님.”
선우는 당황했다. 자신이 화가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간신히 침을 삼키고 말했다.
“저는… 이선우입니다. 꿈을 사러 왔습니다.”
노인은 자신을 ‘결’이라 소개했다. 그는 선우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마치 그의 영혼을 읽는 듯했다.
“어떤 꿈을 원하십니까?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꿈? 잊고 싶은 것을 잊는 꿈? 아니면…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꿈?”
선우는 주저 없이 말했다.
“제 딸, 하은이를 보고 싶습니다. 그녀가 색을 가지고 놀던 그 순간을요. 제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색채마저 사라지게 만든…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선명하게.”
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연민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는 카운터 아래에서 낡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다른 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빛이 담긴 작은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것은… 당신의 딸이 남긴 색의 조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그녀를 통해 느꼈던 모든 색채의 환희가 담긴 꿈의 파편이죠. 하지만 꿈을 사는 데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화가님.”
선우는 숨을 죽였다. 돈이 문제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의 다음 말은 그를 얼어붙게 했다.
“당신이 이 꿈을 통해 얻는 기쁨만큼, 당신은 다시는 세상의 어떤 색깔에도 좌절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하은이가 당신에게 주었던 그 순수한 색의 눈을 다시 뜨고, 그녀가 사랑했던 세상을 당신의 붓으로 다시 채우겠다고… 잃어버린 열정의 마지막 조각을 제게 바치세요.”
그것은 단순히 돈을 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맹세할 수 있을까? 다시는 좌절하지 않고, 무채색 세상에 색을 입힐 수 있을까? 하지만 하은이의 꿈을 볼 수 있다면… 그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맹세하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합니다.”
결은 미소 지으며 유리병을 선우에게 내밀었다. 병은 그의 손 안에서 따뜻하게 빛났다. 결은 작게 속삭였다.
“이것을 마시고, 잠드세요. 상점 뒤편에 준비된 침대에서 편안히 쉬십시오. 꿈은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세요, 꿈은 때로 길을 보여주지만, 걷는 것은 당신의 몫이라는 것을.”
선우는 병 속의 빛을 망설임 없이 마셨다. 차갑고 달콤한 액체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의 몸은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는 결이 안내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자마자, 세상은 부드러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어둠은 이내 사라지고, 그를 감싼 것은 눈부신 빛이었다. 푸른 하늘, 초록빛 잔디, 온갖 색깔의 꽃들이 만발한 들판.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작고 사랑스러운 그림자가 서 있었다. 하은이었다.
그녀는 선명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손에는 보이지 않는 붓을 든 채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짓마다 공기 중에는 투명한 빛깔의 물감이 뿌려졌고, 그것은 이내 무지개가 되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세상의 모든 색이 하은이의 손끝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아빠! 여기 보세요!”
하은이가 고개를 돌려 선우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햇살처럼 따뜻했고, 그녀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듯했다. 선우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충만감이 밀려왔다. 이것이 하은이가 보았던 세상이었을까.
그녀는 작은 손으로 땅에 떨어진 꽃잎 하나를 주워 선우에게 내밀었다. 꽃잎은 붉은색이었지만, 하은이의 손안에서 빛나는 순간 무지개색으로 반짝였다.
“아빠, 예쁘죠? 세상은 전부 색깔로 가득해요. 아빠 붓으로 이걸 다 그려주세요! 아빠 그림은 최고 멋있어요!”
하은이의 목소리에는 슬픔 한 조각 없이 순수한 기쁨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선우의 손을 잡고 들판을 뛰어다녔다. 그녀가 발자국을 남기는 곳마다 풀잎은 더욱 싱그러운 초록으로 빛났고, 꽃들은 더욱 선명한 색을 뿜어냈다. 하은이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세상의 모든 색을 깨우는 마법 같았다.
선우는 하은이의 뒤를 따랐다. 흑백으로 굳어버렸던 그의 시야는 서서히 색채를 되찾았다. 붉은색은 더 붉게, 푸른색은 더 푸르게, 세상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잃어버렸던 눈을 다시 얻은 것 같았다.
하은이는 갑자기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캔버스처럼 펼쳐진 하늘에는 그녀가 그린 무지개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빙그르르 돌며 환하게 웃었다.
“아빠, 내가 아빠한테 줄 선물이 있어요!”
그녀는 작은 손을 뻗어 무지개의 한 조각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선우의 가슴팍에 가져다 놓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이 그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치 잊고 지냈던 색의 감각,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하은이가 그에게 남긴 영원한 영감 그 자체였다.
“아빠, 슬퍼하지 마세요.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화가니까. 이걸로 예쁜 그림 많이 그려주세요. 나는 언제나 아빠 옆에서 아빠 그림 구경할 거예요!”
하은이의 모습은 점점 투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더욱 밝아졌지만, 몸은 서서히 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선우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것은 꿈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슬픔이 없는 곳에서 빛이 되어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하은아… 하은아!”
그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고, 하은이는 완전히 빛이 되어 하늘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하은이가 선물한 따뜻한 색의 조각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
선우는 눈을 떴다. 상점 뒤편 침대의 차가운 감촉이 현실로 그를 이끌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흑백이 아니었다. 침대 시트의 흰색은 미묘한 푸른색을 띠었고, 창밖으로 비치는 새벽하늘은 깊고 부드러운 남색이었다. 먼지 쌓인 상점의 나무 벽에서도 짙은 갈색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은 카운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깊고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화가님.”
선우는 아무 말 없이 결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더 이상 슬픔에 잠긴 화가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 속에서 하은이가 남긴 색의 조각이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가 다시 붓을 들 용기, 그리고 세상을 다시 사랑할 이유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를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모든 색은 당신의 붓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우는 상점을 나섰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는 걷는 동안 주변의 모든 색을 눈으로 담았다. 회색빛 건물도, 낡은 가로등의 빛도, 새벽하늘의 미묘한 그라데이션도. 모든 것이 하은이가 보여준 세상처럼 생생하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온 선우는 곧장 작업실로 향했다. 덮어두었던 캔버스를 열자, 그 안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무채색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붓을 들었다.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내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색채가 살아 숨 쉬는 듯했다. 그는 하은이가 마지막으로 선물한 그 빛을 기억하며, 캔버스 위에 첫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따뜻한 노란색이 무채색 풍경 위에 번져나가자,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색을 되찾은 화가의,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영원히 그의 영감으로 남아있음을 깨달은 아버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눈물이었다.
상점의 문은 다시 닫혔고, ‘꿈을 파는 상점’이라는 간판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꿈을 찾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색이 사라진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들을 위해, 그 상점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