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191화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별똥별

밤의 장막이 서울의 잠 못 드는 빌딩 숲을 감싸 안았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은 별이 아니라 그저 땅 위의 모조품일 뿐이었다. 이지호는 창가에 기댄 채 먹구름처럼 밀려오는 지난날의 기억에 잠겨 있었다. 손안의 낡은 머그컵에서 김이 피어올랐지만, 그 온기는 지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 밤은 유독 차가웠다.

몇 해 전, 이 밤이 가져갔던 소중한 존재를 기억하기에, 지호에게 별은 더 이상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저 아픔을 상기시키는 잔인한 빛줄기일 뿐. 텔레비전을 켤 기운도, 친구에게 전화할 용기도 없었다. 오직 침묵만이 그녀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낡은 책상 위, 먼지 앉은 라디오만이 유일한 동반자였다. 예전에 민서와 함께 듣던, 주파수를 맞추며 깔깔대던 그 라디오. 지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다이얼을 돌렸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은하수였다.

고요 속의 위로

“…오늘 밤, 당신의 마음은 어떤 별자리를 그리고 있나요? 어떤 분에게는 찬란한 북극성일 수도, 또 어떤 분에게는 금방 사라질 별똥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은 별이 뜬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별들은 절대 혼자 빛나지 않습니다.”

은하수의 잔잔한 목소리는 지호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억지로 외면하려 했던 상처가 다시 쓰라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위로는 역설적으로 지호의 슬픔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민서의 얼굴이, 환하게 웃던 그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밤도 별이 많았다. 민서가 별을 보며 소원을 빌자고 졸랐던 밤. ‘언니, 우리 나중에 어른 돼서도 같이 별 보러 다니자. 내가 언니 슬플 때마다 별똥별 따다 줄게.’ 민서의 천진난만한 약속은 이제 영원히 지킬 수 없는 맹세가 되어 버렸다. 지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은하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음 사연입니다. 익명의 청취자 분께서 보내주셨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일기장에는 제가 어릴 적 장난으로 할머니께 드렸던 작은 돌멩이를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적어두셨더군요. 저는 할머니를 잊고 살았는데, 할머니는 저를 그렇게 기억하고 계셨다는 사실에 목이 메었습니다.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과 동시에, 할머니의 사랑이 아직 저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따뜻한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 노래를 신청합니다. 할머니께, 그리고 아직 저를 기억해 주실 세상의 모든 따뜻한 존재들에게 바칩니다.’”

별똥별의 소원

사연이 끝나자,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함께 낯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지호와 민서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였다. 어릴 적, 이 노래를 들으며 민서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미래를 꿈꾸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이 노래… 민서가 정말 좋아했는데.’

지호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라디오 속 노래는 민서의 목소리로 변해, ‘언니, 괜찮아. 언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녀는 그제야 억눌러왔던 감정의 댐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어두운 방을 채웠다. 죄책감과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잊지 못할 사랑이 뒤섞여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래가 끝나고, 은하수의 목소리가 다시 찾아왔다. “네, 참 아름다운 곡이죠. 오늘 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별이 하나씩 떠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는 추억 속의 웃음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지지 않는 희망으로. 그 별은 당신을 비추고, 당신이 어디에 있든 당신의 길을 안내할 겁니다.”

지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창밖을 바라보니, 뿌옇던 시야 너머로 별 하나가 유독 반짝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희미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민서의 별일까. 아니, 민서와 함께 만든, 사라지지 않는 자신만의 별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낡은 서랍을 열어 펜과 종이를 꺼냈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민서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가고 싶었다. 죄책감으로 가려져 있던 사랑을 다시 꺼내어 보고 싶었다.

종이 위에 펜을 올려놓았다. 첫 문장은 ‘사랑하는 민서에게…’ 가 될 것이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희미한 온기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별은 희미했지만, 지호의 마음속에는 사라지지 않을 작은 별똥별 하나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연약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밤을 밝혀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빛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민서와, 그리고 밤하늘의 모든 별들과 함께였다.

다시 라디오에서 은하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은하수였습니다.”

지호는 작게 미소 지었다. 종이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밤은 깊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비로소 희미한 여명이 찾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