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1213화

정우는 차가운 찻잔을 들었다. 찻물은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고, 텁텁한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깊어졌지만, 그의 사무실은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 여전히 낮처럼 밝았다. 먼지 쌓인 서류 더미는 그의 삶의 연대기이자, 끝없이 반복되는 좌절의 기록이었다. 잃어버린 첫사랑, 은서를 찾기 위한 여정은 천 이백여 개의 밤을 지새우게 했고,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피로에 절어 눈을 감았다. 수없이 되뇌었던 은서의 얼굴, 그 희미한 미소가 눈꺼풀 안쪽에서 아른거렸다. 벌써 몇 년인가. 처음에는 희망이라는 거대한 불꽃에 타올랐지만, 이제 그 불꽃은 가늘고 위태로운 심지로 변해버린 듯했다. 그저 습관처럼, 멈출 수 없는 기계처럼 그는 매일 같이 낡은 기록들을 뒤지고 또 뒤졌다. 새로운 단서는 희귀해졌고, 대부분의 시간은 지난 오류를 재확인하거나 이미 답 없는 길을 다시 헤매는 것에 불과했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동방 보육원’이라는 낡은 표지가 붙은 상자를 열었다. 은서가 한때 머물렀던 곳.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더 들여다본 자료들이었다. 원생 명부, 후원자 기록, 교사들의 일지, 그리고 빛바랜 사진들. 그는 기계적으로 사진들을 훑었다.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 어른들의 무덤덤한 표정. 모든 사진에는 슬픔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한 장의 단체 사진이 그의 손에 멈췄다. 1993년, 보육원 설립 20주년 기념식 날 찍힌 사진이었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마당에 모여 있었고, 배경으로는 낡은 보육원 건물과 식당 벽이 보였다. 정우는 이 사진 속 어디에도 은서의 얼굴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기념식 전에 이미 보육원을 떠났거나, 아니면 사진을 찍는 순간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은서와 관련이 있을 만한 실마리가 있을까 해서.

그의 시선은 사진의 오른쪽 하단, 식당 벽에 흐릿하게 찍힌 낙서에 머물렀다. 수백 번이나 보았을 터인데, 왜 이제야 저것이 눈에 들어왔을까? 오랜 세월 벽에 그려진 무수한 낙서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낙서는 달랐다. 희미하게 색이 바래고 지워졌지만, 독특한 형체가 남아 있었다. 작은 몸통에 커다란 눈, 짧은 팔다리를 가진, 정우만이 아는 ‘꿈꾸는 요정’이었다.

꿈꾸는 요정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우는 숨을 들이켰다. ‘꿈꾸는 요정’. 은서가 어릴 적부터 공책 귀퉁이나 엽서에, 심지어는 모래밭에도 그리곤 했던, 그녀만의 시그니처와 같은 그림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은서만의 상상 속 친구. 그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20여 년 전의 흐릿한 사진 속, 벽에 그려진 저 요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돋보기를 들고 사진을 확대했다. 낡은 인화지의 거친 입자 속에서도 요정의 형태는 선명했다. 옆에는 누군가 연필로 쓴 듯한 글자도 희미하게 보였다. ‘언젠가… 다시…’ 나머지는 빛에 바래 읽을 수 없었다. 정우는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이 그림은 은서가 그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은서에게서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그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이 사진 속 낙서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은서의 존재를 증명하는, 오랜 세월 숨겨져 있던 그녀의 흔적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한, 은서는 이 사진이 찍히기 전에 보육원을 떠났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누가, 언제 그린 것인가? 사진이 찍히던 순간에 저 그림이 있었다는 건, 은서가 보육원에 머물던 시기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은서가 떠난 뒤에도 그녀의 그림을 기억하고 벽에 다시 그린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수많은 가설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 작은 단서 하나가 얼마나 거대한 파장을 불러올지는 미지수였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어있던 그의 탐정 본능이 다시 눈을 떴다는 것. 지쳐있던 심장에 새로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정우는 곧바로 컴퓨터를 켰다. 동방 보육원의 기록을 다시 뒤져야 했다. 1993년 당시 보육원에 있었던 아이들, 교사들, 심지어 당시 보육원에서 일했던 식당 아주머니의 기록까지 샅샅이 찾아봐야 했다. 누군가는 저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은서의 ‘꿈꾸는 요정’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잊혀진 이름

다음 날 새벽녘, 정우는 잠 한숨 자지 못하고 자료를 뒤진 끝에 한 이름을 발견했다. ‘박미경’. 1993년 당시 동방 보육원의 조리사로 일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다른 교사들보다 아이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아이들의 그림이나 낙서에 관심이 많다는 기록이 짧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가 보육원을 떠난 후에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옛 원장 수필의 메모가 있었다.

그녀가 어쩌면, 어쩌면 은서와 ‘꿈꾸는 요정’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희미한 희망이 아득한 터널의 끝처럼 멀리서 빛났다. 정우는 손을 뻗어, 떨리는 손끝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감정, 절박함과 기대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뚝. 뚝. 뚝.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흐르다, 이내 나이 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정우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 한 통의 전화가, 수십 년간 잃어버렸던 첫사랑의 마지막 조각을 찾아줄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박미경 선생님 되십니까? 저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탐정, 정우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동방 보육원에 계셨을 때의 일로 여쭤볼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길었고, 정우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침묵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 아니면 마침내 찾아온 진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일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동방 보육원…이라니… 무슨 일이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