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216화

그날은 유난히 작업실의 공기가 무거웠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마저 눅눅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붓은 한참 동안 팔레트 위에서 말라붙어 있었고, 캔버스는 하얀 공백을 뽐내며 지혜를 더욱 위축시켰다. 붓을 든 손은 천근만근이었고, 마음속의 풍경은 뿌연 안개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무언가 그려야 한다는 강박과, 대체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지혜를 짓눌렀다.

흐릿한 눈으로 탁자에 놓인 찻잔을 응시했다. 식어버린 차만큼이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캔버스를 채워왔지만, 가끔 이렇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 특히 오늘은, 오래전 묻어두었던 어떤 기억의 파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녀의 심장을 갉아먹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과거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껏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였다. 닫힌 작업실 문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늘 그랬듯이, 달이였다. 녀석은 작은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와 늘 익숙한 몸짓으로 작업실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회색빛 털에 반쯤 감긴 깊은 눈동자가 지혜를 향했다. 그 눈에는 어떤 질책도, 조급함도 없었다. 그저 깊은 이해와 고요함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달이의 등장이 가져다주는 평화로움은 언제나 지혜의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곤 했다.

“달아.”

지혜는 나지막이 불렀다. 달이는 야옹, 하고 짧게 대답하며 그녀의 발치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털이 종아리를 스치는 감각은 늘 위안이었다. 녀석은 묵묵히 몸을 비비더니, 이내 지혜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따뜻하고 포근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손을 뻗어 달이의 등을 쓸어주자, 녀석은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작은 떨림이 지혜의 굳어있던 마음에도 조용한 파장을 일으켰다.

“달아, 너는 알까? 내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혜는 달이의 털 속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나는 가끔 길을 잃은 것 같아. 이렇게 오래도록 걸어왔는데, 어느 순간 모든 풍경이 흐릿해지는 기분이야. 내가 처음 붓을 잡았던 그날의 설렘, 세상을 온통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던 그 강렬한 욕망이,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잘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떠밀려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온 걸까?”

달이는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깊은 눈으로 지혜를 올려다보았다. 지혜는 달이의 눈에서 오래된 책의 한 구절처럼 지혜로운 메시지를 읽어내곤 했다. 오늘, 그 눈빛은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보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달이는 갑자기 지혜의 무릎에서 내려와 작업실 한쪽 구석에 놓인 오래된 스케치북 쪽으로 걸어갔다. 낡고 바랜 스케치북이었다. 녀석은 앞발로 스케치북의 모서리를 톡톡 건드렸다. 지혜는 그 행동에 이끌려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빛바랜 그림들이 나타났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그렸던 서툰 크레파스화부터, 열정으로 가득했던 청춘의 드로잉들까지. 그때는 완벽하지 않아도, 그저 그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온통 환희였다.

한 페이지에서 지혜의 손가락이 멈췄다. 십대 시절, 그녀가 처음으로 출품했던 공모전에서 보기 좋게 낙선했던 그림이었다. 그때는 밤을 새워가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그림 속 소녀는 맑은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미숙했지만, 그 그림에는 어떤 순수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의 눈빛은, 지금의 지혜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했다.

달이는 다시 지혜의 곁으로 와서, 그녀의 옆구리에 머리를 비볐다. “그때는 그랬지… 결과가 어떻든, 그리는 과정 자체가 전부였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 지금은 어떨까? 나는 너무 많은 것에 얽매여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달이는 대답 대신, 가만히 지혜의 손을 핥았다. 그 따스하고 촉촉한 감각은 위로였다. 녀석의 따스한 눈빛은 말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 소녀는 아직 네 안에 살고 있다고. 다만, 많은 짐을 지고 있느라 목소리가 작아졌을 뿐이라고.’

지혜는 스케치북을 덮고, 달이를 안아 올렸다. 녀석의 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체온과, 작게 울리는 고롱거림이 지혜의 마음에 안온함을 불어넣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렇게 계속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조각들을 다시 찾아내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먼지 쌓인 스케치북 속에서 잊었던 열정을 발견하고, 길고양이의 눈빛에서 잊었던 순수함을 마주하는 것처럼. 삶의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완벽한 풍경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흐릿한 안개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달이는 지혜의 어깨에 기대어 창밖을 응시했다.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이 유리창을 통해 작업실을 채색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그 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지혜는 다시 붓을 들었다. 팔레트 위의 물감은 여전히 말라붙어 있었지만, 더 이상 그것이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색을 짜내고, 물을 섞어 부드럽게 만들었다. 캔버스는 여전히 하얀 공백이었지만, 이제는 그 하얀 공간이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듯 느껴졌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림을 그릴지가 아니었다. 붓을 들고,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두하는 것, 그리고 그 옆에 조용히 앉아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작은 존재, 달이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지혜는 달이의 부드러운 털에 입을 맞추었다. 달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노을빛에 물든 눈빛으로 지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수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고,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순간들에 대한 희미하지만 따뜻한 약속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제1216번째 대화는 그렇게, 말없이 깊은 이해와 위로로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