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242화

그날도, 오늘처럼 눈꽃이 흩날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하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병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 지수는 차가운 손으로 작은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아린의 숨소리는 옅었고, 체온은 간신히 온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장 모니터의 규칙적인 소리만이 이 고요한 공간 속에서 아린이 아직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린아… 엄마 여기 있어.”

귓가에 속삭이는 지수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며칠 밤낮을 한숨도 못 자고 아이 곁을 지킨 흔적이었다. 창문 너머로 눈발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마치 지수의 눈물처럼 보였다. 10년 전, 그 약속이 태어난 날도 이토록 눈이 내렸던가. 모든 것이 시작된 그 겨울날의 약속. 지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고, 이제 그 약속은 아이의 생명과 직결된 위태로운 줄타기가 되어버렸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차가운 복도의 기운이 스며들었다. 지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발소리는 언제나 미묘하게 달랐다. 주저하는 듯하면서도 단호한, 결코 잊을 수 없는 걸음이었다.

“지수야.”

하준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통과 피로가 역력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불꽃이 살아 있는 듯했다. 지수는 아무 말 없이 아린의 손을 감싸 쥐었다. 하준은 몇 걸음 다가와 침대 끝에 섰다. 그와 지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얼음 벽이 존재했다. 수많은 시간과 사건들이 그 벽을 쌓아 올렸다.

“아린이는… 어때?”

하준의 질문에 지수는 비로소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원망,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체념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이대로는… 더 버티기 힘들대요.” 지수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새로운 치료법은… 아직도 희망이 없는 건가요?”

하준은 낡은 서류철 하나를 지수에게 내밀었다. 지수의 시선은 서류철에 고정되었다. 겉면에 적힌 생소한 병원 이름과 연구기관의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극비리에 진행되던 임상 실험이야. 아린이의 병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어.” 하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기대감과 함께 깊은 우려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야.”

지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조건’. 그 말은 언제나 그들의 삶에 비극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10년 전 그 겨울, 눈꽃이 휘날리던 약속의 날에도, 그들은 ‘조건’ 아래서 서로를 포기해야 했다. 아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약속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그들은 다른 길을 걸었고, 서로를 외면했으며, 아린이라는 소중한 존재만을 간신히 붙잡고 살아왔다.

“무슨 조건인데요?” 지수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아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지수의 시선은 마치 어린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새의 그것과 같았다.

하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은 고통스러웠다. “임상 시험의 대상이 되려면… 아주 특별한 기증자가 필요해. 혈액형뿐만 아니라… 유전자형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극히 드문 경우를 찾아야 해.” 그는 말을 멈추고 지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지수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기증자는… 치료 과정 내내 옆에서 지속적으로 공여해야만 해.”

병실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창밖의 눈송이만이 소리 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지수는 하준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했다. 완벽하게 일치하는 유전자형. 지속적인 공여. 그 모든 조건이 가리키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지수의 눈이 흔들렸다. 그제야 그녀의 시선은 낡은 서류철이 아닌, 하준의 얼굴로 향했다. 그의 핏기 없는 입술, 깊어진 눈가의 주름, 그리고 그녀를 향한 간절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시선. 모든 것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망설이며 꺼낸 ‘조건’의 실체를.

그 순간, 10년 전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언덕에서의 기억이 강렬하게 지수를 덮쳤다. 차가운 바람 속에 두 사람은 마주 서 있었다. 막 피어난 설원에서 하준은 지수의 손을 잡고 맹세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린이를 지킬게. 우리의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그 약속은 너무나 굳건했고,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약속의 무게는 두 사람의 모든 것을 다시 시험대에 올리고 있었다.

“네가….” 지수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터져 나왔다. “네가… 기증자라는 말이야?”

하준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는 묵직하게 떨렸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창밖의 눈은 더욱 격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세상이 온통 하얀 절규로 뒤덮이는 듯했다. 지수의 가슴속에서는 오래된 상처가 다시 터져 나와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형태로… 그녀의 삶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너는…” 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준의 병력. 그의 건강 상태. 그가 감당해야 할 위험. 이 모든 것이 마치 칼날처럼 지수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린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있었다. 10년 전 그날처럼,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었다.

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듯한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린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그의 시선은 아린에게 향했다. 병색이 완연한 아이의 작은 얼굴. 그 속에서 그는 자신들의 과거, 그리고 지수의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지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아팠다. 차가운 병실 안에서, 하얀 눈꽃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눈꽃은 마치 그들의 끝나지 않은 비극을, 그리고 너무나도 잔인한 약속의 무게를 증명하듯 춤추고 있었다. 이 선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10년의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혹은 새로운 고통 속으로 뛰어드는, 잔혹한 운명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