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아래 멈춘 약속
밤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아래를 사는 우리들의 시간은 쉼 없이 흐릅니다. 여기,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이진우입니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밤. 혹시 오늘 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그림자처럼 마음에 남은 어떤 약속이 있으신가요? 어쩌면 지키지 못한, 혹은 지켜지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버린 그런 약속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 오래된 약속의 조각들을 주워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늘 저의 방송을 밤늦도록 함께 해주시는 미라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필체가 무척이나 단정해서, 마치 마음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정성껏 써 내려간 글씨 같네요. 미라 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제가 대신 읽어드리겠습니다.
"진우 DJ님께. 안녕하세요. 겨울의 끝자락에서 다시 봄을 기다리는 스물여덟 살 미라입니다. 제게는 열여덟 살, 별이 유난히 쏟아지던 여름밤에 친구와 했던 약속이 있습니다. 그 밤하늘, 북두칠성을 가리키며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십 년 뒤 오늘,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 그때의 꿈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이야기하자고 했었죠. 그때 우리는 정말 세상 모든 별을 다 삼킬 듯이 반짝였습니다. 서로의 눈 속에 우주가 담겨있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십 년이 되는 날입니다. 저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어요. 새벽녘 이슬이 채 가시지 않은 산길을 홀로 걸어 올라, 우리가 약속했던 그 자리에 섰습니다. 십 년 전 그 여름밤처럼 쏟아지지는 않지만, 여전히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밤이었어요.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제 심장은 뜨거웠습니다. 혹시나, 혹시나 그 애도 나처럼 이 자리에 나타날까 봐.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였습니다. 십 년 전의 저는 그 애의 이름 세 글자를 부르며 까르르 웃는 소녀였지만, 십 년 뒤의 저는 그 애의 빈자리를 보며 홀로 서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죠.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서, 사람의 마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그 애에게는 잊혀진 약속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도요. 억울하거나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때 그 별 아래서 우리가 나누었던 꿈들이, 그 순수했던 마음들이 어디로 가버렸을까 하는 아득한 물음이 저를 조금 쓸쓸하게 만들었습니다.
DJ님, 약속이라는 건 대체 뭘까요?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건가요? 아니면 지키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걸까요? 저는 오늘 밤, 제가 간직한 그 약속이, 비록 혼자만의 것이 되었을지라도, 제 삶의 어느 한 페이지를 찬란하게 수놓은 별똥별 같은 순간이었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부디 저의 이 먹먹한 밤에, 당신의 따뜻한 목소리가 작은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미라 드림."
미라 님의 사연, 정말 먹먹하게 다가오네요. 십 년 전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의 장소에서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미라 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약속이라는 건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족쇄가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미라 님처럼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도 하죠.
저도 문득, 오래전 친구와 했던 터무니없는 약속 하나가 떠오르네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서로의 첫 직장 월급을 모아 꼭 아프리카 오지로 봉사를 가자고 했었죠. 꽤나 진지하게 계획까지 세웠던 것 같은데, 각자의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결국 그 약속은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언젠가 그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 문득 그 약속을 이야기하자,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말? 그런 약속을 했었어?" 하고 되묻더군요. 순간 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저 혼자 간직하고 있었던, 저 혼자만의 숙제였던 거죠.
하지만 미라 님, 그리고 저처럼 오래된 약속의 잔해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모든 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약속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요. 오히려 그때 그 순수했던 마음, 그 간절했던 소망이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더 겸손하게 만들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미라 님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도록, 제가 아끼는 노래 한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입니다. 이 노래가 들려주는 시간의 깊이 속에서, 미라 님의 마음도 조금은 평온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음악: 김광석 –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김광석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슴 깊이 파고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한 편의 짧은 인생을 응축해놓은 듯한 노래였죠. 미라 님, 노래 잘 들으셨나요? 여러분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던 그 약속들은, 아마도 시간의 강물 속에 잠겨 있다가도, 이렇게 별이 빛나는 밤에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조약돌 같은 것일 겁니다. 반짝거리는 기억의 조약돌 말이죠.
다음 사연은 닉네임 ‘별똥별’ 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별똥별 님은 제 방송에 자주 사연을 보내주시는 분인데요, 오늘 미라 님의 사연을 들으시고는 급히 메시지를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진우 DJ님, 그리고 미라 님께. 미라 님의 사연을 듣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저에게도 미라 님과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저는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는데, 어린 시절 소꿉친구와 매년 설날 해돋이를 보러 가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작년 설날 아침, 문득 그 약속이 떠올라, 고향 바닷가로 무작정 달려갔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없었죠.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울었습니다. 서운해서가 아니라, 십수 년 전 그 약속을 기억하고 그 자리에 가준 저 자신이 너무 대견하고, 또 그 약속이 여전히 제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해서요. 어쩌면 약속이라는 건, 상대방이 지키든 안 지키든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은 게 아닐까요? 그 약속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과거의 나를 만나고, 또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을 되새기게 되니까요. 미라 님, 혹시 모르죠. 당신의 그 친구도 지금 어딘가에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지도요. 비록 같은 자리에 서 있지 못할지라도, 같은 별을 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거 아닐까요?"
별똥별 님의 메시지, 정말 따뜻하네요. ‘같은 별을 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거 아닐까요?’라는 마지막 말이 가슴에 깊이 와닿습니다. 어쩌면 미라 님의 친구 분도,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그 십 년 전의 약속을 떠올리며 미라 님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 상상만으로도 외롭지 않은 밤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시간 속을 헤쳐나가죠. 하지만 밤이 되면,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별을 봅니다. 이 라디오 전파를 통해,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이렇게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혹은 지켜지지 않은 약속 때문에 혹시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아팠던 분이 계시다면, 오늘 밤만큼은 그 약속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그 약속이 당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그리고 그 약속을 통해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말이죠. 어쩌면 약속은 미래를 묶는 족쇄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아름다운 다리일지도 모릅니다. 반짝이는 기억의 다리요.
오늘 밤도 깊어갑니다. 여러분의 밤하늘에도 언제나 별이 빛나기를. 그리고 그 별빛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들이 남긴 흔적들이, 상처가 아닌 아름다운 별무리가 되어 당신을 감싸 안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이진우였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다시 만나요.
… (fade out music)

